황하….

꿈에도 가본적 없던 곳이지만, ‘황하’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고 내안의 친근함으로 다가오는건 학창지설 소지로의 ‘대황하’라는 음악을 통한 만남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음악으로 만났던 황하는 밝고 환한곳을 향해 굽이굽이 흐르다가 어느 순간 물길을 잃고 까마득해지고는 망설임과 머뭇거림으로 주저하다 다시 그 흐름을 찾아 장대히 흘러가는 듯 하였다.
마치 황하가 실어다준 비옥한 토양들이 황하문명이라는 찬란함의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가, 황하의 범람으로 수많은 과거가, 그 존재들이 사라지기도 하였으나  또한 여전히 그 숱한 세월들을 싣고 유유히 흘러가듯이 말이다.

河南省 약초답사를 떠나는길.

하남성에서 주로 많이 보게될 신이, 현호색, 산약, 우슬, 국화, 백지등에 관한 사전자료를 준비해두긴 하였지만,  하남성에 도착할 때 까지만 해도 우리들의 주 관심사는 懷慶지방의 지황을 제대로 보고오는 일이었다.
그 곳의 지황재배지 환경은 어떠하며 우리나라에서 재배되고있는 지황(Rehmannia glutinosa)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실제 눈으로 입으로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 지황에 대해서는 뭔가 끝장을 보리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 지황을 만나러 가는 길 어디쯤에 아마도 황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省都인 鄭州를 중심으로 豫라 부르기도 하는 하남성은 豫州에 속해  九州의 가운데에 위치하여 中州 또는 중원이라 일컬어지는데 중국의 역사문화가 시작되는 商代(은나라)유적지가 발견된 바로 이곳으로 부터 저 거대한 중원문화가 시작된다.

武陟으로 가는 봉고차 안은 오늘 보게될 약재들의 기원과 성상의 구별에 관한 논쟁으로 뜨겁다.
오늘 우리가 찾아가는 곳은 정주에서 서북방향에 위치한 懷慶지방 또는 懷慶府라 일컬어지는 곳으로 心陽, 溫縣, 武陟, 修武, 博愛를 아우르는 5000Km가 넘는 거대한 황하의 중하류를 끼고 있는 역사적인 古都들이다. 이곳 懷慶지방에는 4대 약재라 하여 회경지방의 懷를 그 이름앞에 두어 懷牛膝, 懷山藥, 懷
地黃, 懷菊花에 대한 재배와 연구가 할발하다한다.

누런 황톳물이 넘실대며 흘러가는 장관에 우리 일행은 지나가던 大橋위에다가 홀리듯이 그만 차를 세우고 만다. 비옥한 황토지를 이루며, 중국 문명의 발생지가 된 황허강의 쿨렁이며 흘러가는 모습은 마치 태고의 울림과도 같이 내 심장의 고동을 자극한다.  ‘물 1말에 진흙이 6되’ 라는 황하강은 말 그대로 황톳물이다.

황허의 물로 적셔진 비옥한 황토땅을 黃地라 한다면 黃泉의 기운을 그 뿌리에 가득 담아올렸다 하여 地黃이라 일컫는다는 지황의 이름은 또 이곳에 얼마나 어울림직한 말인지….
황허강이 실어다 주는 비옥한 땅을 댓가로 이곳은 건조한 기후의 영향으로 인한 가뭄과 화하의 범람으로 인한 홍수를 톡톡히 치루고 있는곳이기도 하다. 모든 것은 양면성을 가지는법.  모두가 좋기만 하고 또 모두가 나쁘기만 한 것은 이세상 어디에도 없으리라.

무척시 과학기술위원회 앞에서 차는 멈춘다.
마치 유람객과도 같은 우리들의 복장이나 용모가 무색하게, 입구부터 미리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십수명의 사람들은 한 분도 빠짐없이 양복을 차려입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털고, 닦고, 광을 내신 모습들이 방문객들이 드문 이곳을 찾은 객들에 대한 배려와 호기심, 기대를 그대로 드러내는 듯 하다.
방으로 들어서니 탁자위에는 언제 도착할지 모를 손님들을 위해 미리 차려놓은 다과들이 한상 그득하다.
그중에서 유독 우리들의 눈길을 잡아 끄는 코카콜라병.
차문화가 발달한 중국에서 탄산음료로 손님들을 접대하는 양이 어째 어색하다.
권하기에 맛을 보니, 이건 톡쏘는 콜라맛과 뭔가 조금은 다른 것 같은데..
병의 모양이나 내용물의 색이 영락없이 콜라이며 맛까지 은근히 콜라맛을 흉내낸 이것은 이곳 기술센타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지황음료이다.
나중에 식당에 가서 또한번 우리를 감탄시켰던 것이 지역 특산 약재인 지황뿌리, 잎, 산약,국화등을 재료로 해서 만든 갖가지 요리들이었는데  지역의 약재를 연구하고 활용하는 이들의 노력들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준비되어져있던 지황에 관한 연구자료 비디오 테잎을 보고난뒤,  회경지방의 지황과, 산약, 우슬의 형태와 맛을 본다.
이곳의 특등품 지황은 크기가 어른들 주먹만하다. 단면을 잘라보니 미황색의 국화꽃 문양이 선명하다.  한번 쪄서 말린 건지황의 단면은 오랫동안 고은 교이와 같이 끈적끈적한 진액이 가득차있다.  이 상태로 두어도 잘 상하지 않는다는데  단맛이 강해 그렇다는게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건조한 산약의 형태는 설날 뽑는 떡가래 같기도 하고,  굵은 엿가락 같기도 하다.
이것은 光산약이라는 것으로 이곳 懷山藥을 물에 담가 약간 가열한다음 목판위에 놓고 돌돌 문지르면서 건조기킨 것이다.

회우슬은 마치 황기와 같이 뿌리가 곧고 곁가지가 없으며 육이 충실한데 우슬의 쓰고 신맛을 각오하고, 뿌리를 조금 잘라 맛을 보니 의외로 고소하고 단맛이 입안에 남는다.
이곳의 기술자?학자?중의사분들과 우리 일행간의 토론이 이어졌다.
주로 이곳 4대 약재들의 재배현황, 생산기술, 가공현황 등등에 관한 실정과 연구정도, 그리고 임상효과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이렇게 계속 되는 이야기들은 아마 그 끝을 찾기가 힘들 것 같다.
오후에 재배지를 둘러보아야 할 일정으로 아쉬운 마음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재배지로 가는 길가 도로에는 주황색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다름아닌 옥수수알들.. 이렇게 길가에 내다 널어놓은 옥수수들은 주로 동물들의 사료로 이용된다고 한다.
온 가족들이 모두나와 옥수수 낱알을 털고, 널어 놓은 옥수수알들을 뒤집고, 또 때로는 우두커니 지키고 앉아 있는 모습들이 정겹다.
이곳 사람들은 경계심보다는 호기심으로 우리를 대한다.

재배지에 도착…

지황밭이라고 도착한 곳인데 멀리서 봐서는 배추밭으로 알아볼 만큼 지황잎이 크고 무성하다.
우리나라 지황밭의 마치 땅에 바짝 엎드려 포폭을 하고있는 듯한 형상과는 영 딴판이다.
국산 지황의 잎이 작고 두터우며 솜털이 보송보송 묻어있다면, 이곳의 지황잎은 우선 크기가 크고, 두께가 얇으며 솜털이 적다.
뒷면은 붉은 자색을 띄고 있으나 잎맥에는 별로 붉은빛이 드러나지 않는다.
뿌리를 캐어보니 역시나 어른 주먹만한 놈이 마치 고구마처럼 하나 달랑 달려있는데 국산 지황을 한 뿌리 캐어본 사람이라면 으레히 길쭉한 지황들이 주렁주렁 달려있을것이라 짐작하고 캐어보았다가 그 모양새를 보고는 우습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그  한 덩어리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될 것 같다.  

우슬은 지상부의 생김은 크게 차이가 없으나, 줄기 마디 부분이 툭 불거져 나오며 아주 붉은 선홍빛을 띄고 있는 것이 牛膝이라는 이름이 이렇게 걸맞게 느껴질수가 없다.
뿌리부분은 역시 과학기술위원회에서 본 샘플과 같은 형태로 마치 황기와 같이 죽 죽 뻗은 직근의 형태이다.
한 때 잠시동안은 중국의 회우슬이 국산 황기로 둔갑하여 유통되었던 적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을때만해도 우리나라의 우슬뿌리만 머릿속에 그려져 있던 나는 ‘무슨.. 아무리 약재를 모르는 사람들이라지만 그렇게 형태가 다른걸 어찌 분별을 못할까..’ 속으로 혀를 찼더니만.  회우슬의 모양새를 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산약과 국화재배지 까지 둘러보고 돌아오는길의 차안은 방금 본 약재들을 가지고 어떤 때는 어떤 기원의 약재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냐 하는 논쟁이 한창인데 지황은 워낙 국산 지황과 달라 고개가 갸우뚱해지지만, 우슬 하나만은 제대로 봤다는 생각에 모두들 득의양양이다.
補肝腎?强筋骨 하는 작용을 갖기위해서는 川우슬(Cyathula officinallis)이나 土우슬(국산 쇠무릎 Achyranthes japonica) 보다는 두껍고 肉이 많으며, 그 맛을 보면 단맛이 입안에 감도는 회우슬을 사용하는 것이 옳으리라는 의견에선 모두 만장일치를 보았다.

차는 어느새 시골장의 한 가운데를 헤치면서 지나고 있는 중이다.
갖가지 난전에는 과일이며 채소, 자질구레한 생활용품들까지 총동원이고, 즉석에서 만들어내는 국수(?)차앞의 길게 이어진 걸상에는 국수그릇에 고개를 박고있는 손님들로 만원이다.
구두수선, 이발난전 까지 있더니 급기야는 치과까지 난전을 벌여놓았다.
난전 치과라고 해야 의자 하나에 희안한 기구들이 널려있는 펼쳐놓은 가방하나, 그리고 이뽑는 사람과 이를 뽑기위해 목에는 수건을 두르고, 하늘을 향해 있는대로 입을 벌리고 있는 이뽑힐 사람이면 끝이다.
모두들 여전히 차내토론이 한창들이고, 달리는 차안이라 카메라 셔터도 마음대로 눌러대지 못하는 내 마음만 애닮다.

이튿날..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오늘은 소림사를 둘러싸고 있는 嵩山에서 약초꾼들을 만나 爬山을 해보려 하였건만..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소림사에 가까워질수록 빗줄기가 거세지고. 이런날은 파산이 아니라 관광도 힘들겠다.

 하릴없이 소림사 부도탑림과 경내를 둘러보고, 아쉬운 마음에 소림사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각종 秘方(주로 타박상과 골절상을 다루려나?)들이 실린 책이라도 혹여 있으려나 기대해보았지만 기념품 가게는 줄을 이어 섰어도 서점은 찾을수가 없다.

 


숭산은 하도 험해서 날이 좋아도 오르기가 힘드니 그냥 돌아가자는 안내인과 운전기사분의 손사래를 모르쇠하고 억지로 숭산으로 향하긴 하였으나, 숭산입구에는 약초꾼들은커녕 중국 어디를 가도 볼 수 있는 뭐라도 하나 내다놓고 팔고있는 장사꾼들 조차 보이지 않는다.
쏟아지는 비를 우산으로 막느라 숭산의 기세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에는 보기에도 험한 저 돌산을 오르기는 역시 무리겠구나. 게다가 모두들 비를 많이 맞아 으슬으슬 추워지기 시작하는 몸으로는 .. 아쉬운 마음으로 차를 돌린다.

 지황을 보기 위해 멀리도 떠나온 여행이었지만. 우리는 예상치 못했던 회우슬이라는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기대가 많으면 실망도 큰 법이지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선물을 받았을 때의 기쁨이란…
계획할수 있고, 예측가능한 일들이 척척 벌어질때의 순조로움 보다는 오히려 우리도 어찌할수 없는 힘에 이끌려 생기는 우연이라는 요소들에 의한 흥미진진함 그 윤택함들에 점수를 더 주는 나에게는 오히려 이런 만남이 반갑고 고맙기만 하다.  

 함께 약초답사를 떠났던 본초학 교수님들, J박사님, 현지 약재공사를 소개시켜주기 위해 함께 해주셨던 D생약의 사장님, 그리고 우리일행.. 모두 조금씩은 다른 이유들을 가지고 출바한 여행이었지만, 올바른 한약재를 위해서라는 목적지를 향해 함께했던 첫 발걸음이었다.

 

사인의 향기를 쫓아 조용한 은둔의 나라, 잠에서 이제 막 깨어나려고 하는 나라, 세상에서 제일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나라, 착하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나라 라오스를 찾아 갑니다.

라오스의 사인의 주요산지

 남부산악지대 :
팍세(Pakxe)

중부 산악지대 :
 라오바오(Lao Bao)

북부 산악지대 :
루왕 푸라방  ( Louang Phrabang)
루왕 남타 ( Louang Namtha)
퐁사리 (Pongsali)

방콕을 경유하여


아! 메콩강

인도차이나반도에 메콩강을 빼고 무엇을 이야기 할 수 있으랴.
라오스의 계절은 두가지로 느껴집니다.
비가 오는 계절인 우기(4월말- 8월말)와 비가 오지 않는 계절인 건기(9월- 4월)입니다.
우기에 지독시리 내리는 비를 담아내야 하기에 메콩강은 그만큼 크고 길고 넓은가 봅니다.

사인은 라오스 소수민족의 삶의 터전인 산악지대에서 주로 채취됩니다.
우기엔 길이 질퍽거려 차량통행이 어렵습니다.

아이들의 호기심은 어디서나 똑같은가 봅니다. 사람과 짐승이 한가족처럼 살아갑니다.
더불어 사는 돼지가족도 예쁘군요… 


라오스 산악 밀림속의 사인


뿌리에서 곧추 올라온 외줄기에 대나무 잎 같이 생긴 잎들이 어긋나게 달려있습니다.
땅속의 뿌리는 대나무 뿌리처럼 서로 연결되어 번져 나갑니다


사인은 열매가 뿌리에 달리는 독특한 형태로 축사밀(縮砂密)이라고도 합니다.
5월에 뿌리에서 꽃이 피고 열매가 달리기 시작해  우기를 견디며 성숙하다가 우기가 끝나는 8월말부터 채취해야 사인의 약성을 충분히 얻을 수 있습니다.
질퍽거리는 땅의 습기를 견디며 익어 가는 사인의 라이프 사이클은 健脾化濕 理氣安胎의 약성을 짐작하게 합니다.

사인의 채취와 건조

사인은 채취 시기와 건조방법이 아주 중요하다고 합니다.
보통 우기에 채취한 미성숙한 사인은 약성이 떨어질뿐더러 건조가 충분히 되지 않아 곰팡이가 필 확률이 높아 주의 깊은 감별이 요구됩니다. 반드시 우기가 끝나길 기다려, 채취하고 건조하도록 산지의 주민들을 잘 설득하여야 하겠습니다.

사인은 껍질째 대나무 건조대에서 말리고 아래에서 불을 때어 연기로 건조시킵니다.


사인은 한의학에서 방향화습약(芳香化濕藥)으로 분류되어 체하여 명치와 배가 아프고 그득할 때, 게우거나 설사, 이질 그리고 태동불안 등의 증상이 있을 때 요긴하게 사용되는 한약재입니다.

기원식물이 되는 양춘사(陽春砂), 해남사(海南砂), 축사(縮砂)는 남방계식물이므로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고, 중국의 남쪽지방이나 라오스, 태국, 미얀마 등지에서 생산됩니다.

성숙한 사인의 껍질을 벗기면 홍갈색이나 짙은 고동색을 띤 향기로운 종인이 나오는 데 씹어보면 약간 매운 듯 하며 화한 향내가 입안에 감돌게 됩니다. 그런 방향성 성분이 체기를 내리고 비위를 데워주며 보(補)해주고 임신시의 태동불안 등을 해소하는 작용을 나타냅니다.
 

후기 : 라오스는 지구상에서 아직 오염되지 않고 남아있는 몇 나라중의 하나입니다.

천혜의 자연환경 속에서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지만 자본주의의 입맛에 맞게 상품을 가공하고 포장하는 능력은 아직 부족합니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내륙에 위치한 라오스에서 머나먼 우리나라까지 최상품의 한약재 <사인>을 생산하여 수입하기 위해선 현장에서 뛰는 많은 한국인들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오지에서 주민들을 만나 채취시기와 가공방법을 설명하고 또한 안정적인 원료의 확보를 위해 사인을 재배하는 방법까지 지도하고 있는 그 분들의 노력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검정색과 빨강색이 만나면 보라색이 될까?

紫草의 보라색은 그런 만남이다.

紫草를 캐보면 紫草뿌리의 외피는 검정색을 주로 띠고 조금만 외피를 긁으면 빨강색의 내피가 나타난다. 년수가 낮을수록 빨강색이 선명하고 년수가 오래되면 검정색이 강해진다.
건조가 되면서 점점 자주빛으로 변해진다. 마치 붉은 선혈이 점점 말라 가면서 흑자색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약초를 대하면서 약초가 외면으로 나타내는 색깔과 약초의 약성과는 너무나 많은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色은 우연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원리와 질서에 의해 만들어지며 그 나름의 의미가 분명히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예를 들어
芍藥의 라이프사이클에 나타나는 붉은 색, 丹蔘의 입술연지 같은 붉은 색, 蘇木의 붉은 나무결, 핏빛 심장을 뭉쳐놓은 것 같은 기린갈의 수지인 血竭, 牧丹의 검자줏빛 외피, 鷄血藤의 색깔 등등 모두 혈분에 들어가 보혈, 생혈하거나 활혈화어하는 즉 血과 관련된 주치를 가지고 있다.
물론 많은 예외도 있을 수 있고 색깔만 가지고 약성을 평할 수는 없겠지만 약성을 이해하는 데 많은 단초가 색깔을 관찰하는 데서도 발견될 수 있으리라.

한의과대학을 들어온 누구에나 뭔가 신비한 약초에 대한 관심들은 있기 마련이다. 동양의 학문을 공부하다보면 뭔가 불로초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같은 것 말이다.
나에게도 역시 그러한 것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지치로 불리는 紫草였다.
팔십 먹은 노인이 오래 묵은 야생자초를 달여먹고는 삼일 동안 취해 잠만 자다가 깨어나서는 홍등가의 아가씨 화대가 얼마인지 물었다는 이야기라든가, 불치의 병을 앓던 이가 야생자초만 구해 달여 먹고는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 하물며 신경통엔 지치술이 최고라던가 하는 등등 민간에서 자초에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들어 왔기 때문이다.

특히 자초는 겨울 눈 덮인 산에서 주로 캐는데 오래 묵은 자초가 있는 곳은 주위의 눈이 붉그스레하게 녹아 있어 캐는 이는 그것을 보고 찾아낸다는 등 자초는 신비스러울 수 있는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는 약초였다.

그러나 야생 자초를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끔 장터에서 미끈하게 잘 빠진 재배된 자초가 보이긴 했지만……
내가 약초꾼 강씨를 처음 만난 것은 경북 영천의 장날에서다.
영천의 장은 아직도 큰장의 면목을 유지하고 있어 장날이면 전국각지의 상인들이 농산물과 약재를 거래하려고 모여든다.
소란한 장날 부산한 시장의 한 귀퉁이에서 이상하게 생긴 통통한 약초 몇 무더기를 놓고 추운 듯 쪼그리고 앉아 있는 50대 중반의 남자가 보였다.
어린아이 팔뚝 굵기만한 흑자색의 약초뿌리가 궁금하여 이름을 물어보니 지치라고 한다. 가격을 물어 보니 한 뿌리에 30만원이란다.
드디어 야생자초를 발견했다는데 한번 놀라고 가격이 이렇게 높은데 다시 한 번 놀랐다.

야생의 자초는 굵기와 년 수에 따라 가격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정확하게 년 수를 알아낼 수 없지만 보통 생체일 경우 10년 이상이면 엄지손가락 보다 조금 더 굵은 정도의 굵기가 되고 20년, 30년으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굵어져 어린아이 팔뚝만큼 굵어진다. 오래되면 속이 썩어 물이 차는 경우가 많아 캐내면 물이 말라 버려 중량이 감소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임자를 물색한 다음 캐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마치 산삼 캐는 이야기를 듣는 듯하다.

일반적으로 씨가 떨어져 자초의 형태를 이루면 3년생이 되니 보통 흔하게 캐는 것은 4∼5년생이 제일 많다고 한다. 강씨를 졸라 함께 자초를 캐러가기로 약속을 받아내곤 헤어졌는데, 아무래도 30만원짜리 야생자초가 탐이나 여기저기 돈을 구하여 다시 찾아가니 이미 없었다.
주위에 물어보니 내가 가자마자 임자가 나타나 팔고 갔다는 것이다.
아, 물건의 임자는 따로 있는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다음 만날 것이 궁금해졌다.

아침 8시에 의성의 아파트 앞에서 강씨를 만났다.
저번처럼 구부정한 어깨를 하고는 이 사람들이 왜 자기와 더불어 산으로 가려하는지 궁금한지 자꾸만 쳐다본다.
약초를 캐서 생계를 이어온 지 벌써 30년, 그 동안 의성에서 자기와 더불어 약초를 캐오던 2∼30명에 달했던 약초꾼들은 대부분 나이가 들어 사망하거나 약초캐기를 포기해버려 남아있는 사람은 자기 외에 한 사람 정도가 더 있다고 한다.
약초를 캐서 자식 공부까지 시켰다는 강씨는 우리 시대의 몇 안 되는 전업 약초꾼이었다.

의성에서 927번 지방도로를 따라 신평으로 가는 동안 경북의 내륙에 이렇게 깊은 골들이 많이 있나 새삼 느껴본다. 예전엔 이렇게 넓고 깊은 산과 골들에서 수많은 약초가 캐어졌을 것이고 지금은 여기가 주인(약초꾼)이 없는 무주공산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 아쉬운 감회가 든다.
강씨의 말이 이제는 약초꾼이 없어 혼자는 먹고 살만 하단다.

이윽고 산밑에 도달한 강씨는 휘적 휘적 산을 오른다. 깡마르고 구부정해서 약해보이는 강씨이지만 산에서는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여유롭게 산을 오른다.
뒤쳐지는 우리를 생각한 듯. 길이 없는 곳을 약을 캐는 곡괭이로 길을 잡아주고는 조심하여 따라 오란다. 뒤따르는 우리는 벌써 숨이 턱에 받혀 오른다.

아직 삼월 초순이라 쌀쌀한 날씨다. 곳곳에 녹지 않은 눈들이 쌓여 있다.
산의 8부 능선쯤에서 강씨의 시선이 바빠진다. 소나무군락이 참나무군락에 밀려 올라간 경계선에서 소나무가 있는 지역쪽으로 지치가 잘 자란다며 주변을 둘러본다.

드디어 강씨의 신호가 왔다. 자초였다. 줄기가 말라 있어 도감속의 자초와는 달라 보였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니 적갈색의 솜털이 난 줄기이며, 주위에 떨어진 말라버린 잎에 난 잎맥이 바로 자초였다. 도감에서 보지 못한 하얀 씨앗들이 새싹의 눈처럼 졸망 졸망 달렸다.

8부 능선에서 정상까지 드문 드문 자초를 발견하며 올라갔다.
자초는 한 곳에서 발견되면 주변에 1∼2미터의 간격으로 2∼3뿌리가 모여 있다.
자연적으로 씨앗이 떨어져 자란 형태라고나 할까?
한뿌리에 줄기가 여러 개가 올라온 것은 뿌리가 굵고 해서 년 수가 좀 오래된 자초임을 알겠다.
눈속에 둥글레가 까만 열매를 달고 있고, 삽주도 바삭 마른 채 눈밭에 떨고 있다. 반나절 동안 세 사람이 열댓뿌리 정도를 캔 것 같은데, 내가 캔 것은 고작 한 뿌리다.

강씨의 말을 빌리면 자초를 하루에 바짝 캐면 생체 2∼3근 정도를 캐는 데 작은 것은 돈이 안되고 10년 이상된 것을 캐야 돈이 된다고 한다.
10년 이상된 것은 주로 한약방이나 개소주집으로 팔려나간다고 하는 데 한의원이 주 소비처가 아니라는 사실이 뜻밖이다. 산을 내려오는 내내 과연 귀한 야생약초의 주인은 누구여야 하는지 되씹어본다.

1999년 5월 27일 우리는 9박10일의 일정으로 중국의 신강성으로 갔다.


사막에 사는 육종용과 쇄양이란 친구를 만나기 위해….
육종용은 사막의 인삼이란 대우를 받고, 쇄양은 興陽이란 별칭을 받고 있을 정도로 뛰어난 약효를 갖고 있지만 그 산지가 워낙 멀리 있다보니 한의사의 주목을 상대적으로 덜 받고 있는 약재이다.
하지만 난 그 친구들의 뛰어난 약성에 마음이 끌려서라기보다 그들이 그렇게 까마득한 거리에 살고 있다는 그 자체가 좋았다.
비행기로 베이징까지 날아가 다시 가장 빠르다는 열차 특쾌를 타고 3박4일을 간 다음 거기서 다시 차를 대절해 3∼400km를 달려가야 만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나에게 분명 설레임으로 다가왔다.

“어느 하늘밑 잡초 무성한 언덕이어도 좋아,
어느 하늘밑 억세게 황량한 벌판이어도 좋아,
공간 가득히 허무가 숨쉬고, 그리고 하늘 밑 어디에라도,
내 시선이 뻗어 저 무한의 거리가 까무러치도록 멀어서 혼자서만 외로워하는 그런 곳이면 좋아…”

80년대 초 대학가요제에서 잠깐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사라져간 노래의 가사처럼 난 가끔 아주 까무러치도록 먼 곳으로 한번 가보고 싶었다. 그리고 바람이 불어대고 시선 줄 곳은 아무 데도 없는 황량한 벌판에 한번 서 있어보고도 싶었다. 가슴을 휘돌아 몰아쳐 오는 미친 듯한 바람에 자신을 맡기고 세상의 끝까지 질주해 보고 싶은 유혹이 나를 전율하게 한다.

돌려짓기로 재배해야

출렁이는 침대칸에서 막 눈을 뜨니 차창으로 거대한 흙더미에 굴을 파고
문만 달랑 달아놓은 흙집들이 보였다 사라졌다한다.
여기가 어디인가. 지금이 몇 시인가.
아침 8시경이다. 주위에 물어보니 이제 막 낙양에 도착한단다. 옛 고도를 통과하며 차츰 정신이 든다.
북경발 우루무치행 밤열차에 몸을 실은 우리들은 황량한 사막으로 간다는 흥분에 휩싸여 밤새 주절거렸다.
오랫동안 약초재배를 해온 조선족 박영감은 통역겸으로 우리와 합세하였는데, 약초를 재배하는 데 가장 좋은 씨앗은 야생에서 씨앗을 받아 첫 세대만 재배하고 다음 세대는 재배하지 말라고 한다.
첫 세대 말고 다음 세대는 반드시 약해진다고. 약초는 반드시 돌려짓기로 재배해야 한다고도 한다.
안국시장의 정경리도 한마디한다.
북경의 제약청에서 1년에 육종용 3∼400t을 갖다 쓰는데 신강의 약재 라오반이 때마다 많은 사람을 데리고 사막으로 들어가 캐 나온다고 한다. 중량을 높이려고 소금을 먹여 재운다고 한다.
곤륜산 남부에서 나는 육종용은 목질이 많고 곤륜산의 북부는 육질이 많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몰라도 뭐가 중요한가. 좁고 흔들리는 침대칸에서 남자들 여럿이 모여 술이야기, 군대이야기 여자이야기 옛날이야기 등등 되는 대로 지껄여 가며 밤을 지내왔다.

황토의 바다를 통과하며

오후 2시경 西安을 지나고 5시가 되자 황하의 지천을 통과하는 듯 황토물이 흐르는 강들이 보인다.
어떻게 강물이 이렇게 시뻘건가.
예전 히말라야 산록을 타고 내려오는 얼음 녹은 인더스강물이 연초록임을 보고 의아해 했지만, 황하의 시뻘건 강물 역시 우리네 상식을 깨트려 버린다. 지금 통과하는 이곳은 거대한 황토의 바다다.
가끔 담틀집들이 보이고 그 사이로 황토와 더불어 살아가는 아이들의 뛰노는 모습이 보인다.
저녁이 되면서 감숙성으로 들어가는 듯 지세가 험해진다. 깍아지른 산들을 뚫고 철길은 달리고 해발 3000m가 넘는다는 높은 산엔 계단식의 밭들이 주름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강우량이 적고 건조하여 중국에서도 가장 빈곤하다는 성이 감숙성이다.

 주름모양으로 그려진 계단식 밭

당귀니 대황이니 하는 약재의 주산지가 되는 이유가 농사보단 고산의 약초가 오히려 재배의 적지가 됨을 높은 산에 그려진 계단식 산들을 보니 알겠다.
정경리가 文峰中藥材市長에 가면 감숙성산 약재를 주로 판매한다고 하면서 한번 가보자고 한다.
창문에 머리를 박고 차창 밖을 내다보니 어둠이 짙게 깔린 바깥은 희뿌연 하늘과 흙산이 대비를 이루며 끝없이 펼쳐간다.
아, 감숙의 산야를 이렇게 지나는구나.
다음날 아침 침대칸의 덜컹거림으로 자연스럽게 눈을 뜨니 아직도 황토언덕과 흙산들이다. 흙산과 단조로운 구릉 그리고 아주 가끔 보이는 집들은 서북풍의 몰아치는 거센 바람을 피하기 위한 듯 납작한 성곽형태로 지어져 두터운 흙담으로 막아 놓았다. 한국의 흙집에서 느끼는 포근함과는 전혀 다른 황량하고 적막한 느낌뿐이다. 눈만 뜨면 보이는 적막한 강산을 계속하여 대한다면 사람들의 몸과 마음은 어떻게 변할까.
중국의 서북지방을 철마로 가로지르며 素問의 異法方宜論을 떠올린다.
단조로운 하늘과 땅들이 하루 이틀 계속 반복되는 동안 난 서서히 기가 질리고 있었다. 광활한 땅들이 오히려 답답한 감옥처럼 옥죄여 오고 황갈색의 단조로운 색깔에 둘러싸인 이 공간이 끝이 없는 긴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듯 어느새 내 가슴에 寂寞無朕의 암담함으로 깔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막의 내음이 실려오고

43시간을 달려 드디어 중국과 서역의 경계인 가곡관에 도착했다.
서역으로 가는 마지막 이별의 장소인 가곡관 저 너머로 사막의 내음이 실려오는 듯 하다.
열차에서 내려 사진을 찍어대는 키다리 아가씨의 해맑은 미소가 별나게 아름다워 보인다.
마치 땅의 끝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땅이 하늘과 닿아 지평선을 이루고 있는 아득한 먼 곳에 시선을 던지고는 석양이 내리고 어둠이 깃들 때까지 내내 창 밖을 바라보았다. 촛점이 맞춰지지 않아 아련할 수밖에 없는 대지를 바라보려니 그냥 눈물이 나온다.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움직임이다. 무엇이 나를 뭉클하게 하는가. 태고의 적막이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나의 어느 부분을 건드리는가?

어느 누군가 발정 난 말의 정액이 뿌려진 자리에서 육종용이 돋아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난 육종용의 생태를 한번도 보지 않았으니 당연히 그 말을 믿었고, 육종용 정도라면 그 정도는 되지 않겠느냐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발정 난 말의 대포 같은 성기를 상상만 해도 육종용의 힘이 얼마나 놀라울까를 그려볼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약초를 둘러싼 이와 같은 이야기는 비단 육종용뿐만 아니다. 옛날 즐겨 보았던 무협지에서뿐만 아니라 역대로 내려오는 본초서에조차 약초에 대한 효능이 지나치게 신비스럽게 포장된 부분이 끼어져 있다.
불로초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와 관심이 약초를 신비화시켰을 부분도 있고, 더군다나 교통이 나쁘고 정보의 전달이 어두웠을 옛날이라면 본초가라 하더라도 그 많은 종류의 약재들의 현장들을 일일이 찾아보기 어려웠을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강성까지 4000km를 뛰어 넘어 가는 이 길은 어찌 보면 약초에 대한 그와 같은 환상을 깨어주기 위해 가는 냉정한 길인지도 모른다.

‘움푹꺼진 땅’ 투루판

신강성을 통과할 때 보이는 것은 그저 자갈과 모래언덕과 그리고 여기에 한때 사람이 살았을 거라고 추정되는 모래무덤들뿐이지만 일출의 광경은 역시 스펙타클하다.
일출이 지나고 아침이 되어 사막 속의 도시 吐魯番에 도착했다. 위구르어로‘움푹꺼진 땅’이라는 뜻의 투루판은 여름철 온도가 42℃까지 올라가는 도시로 모래에 달걀을 묻으면 달걀이 익는다고 한다.
반면 겨울철은 영하 30도에서 35도의 혹한이 찾아와 기온의 차이가 아주 심한 곳이다.
기온차가 크고 일조량이 많아 투루판의 과일은 당도가 높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특히 포도는 재배역사가 2000년이나 된다고 하는데 우루무치의 시장 곳곳에서 투루판에서 재배한 씨 없는 건포도를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투루판역을 통과하면서 차창 밖으로 보여지는 투루판의 풍광은 가난에 찌든 작은 도시에 불과했다.
역무원의 의복도 남루하고 사람들의 몰골도 초라한 것을 보니, 허지만 사람들은 얼굴들은 모두 순해 보인다.

아니 여기가 天山인가?

아침이 되어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침대칸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서니 사람들이 차창에 붙어 사막의 저 끝을 쳐다본다. 멀리에서 머리에 흰눈을 뒤집어쓴 설산들이 보인다.
이 메마른 사막에 웬 설산인가. 아니 여기가 天山인가. 위치상 천산은 아닌 듯 한데…. 오랫동안 황량한 모래사막만을 보고 오느라 지친 승객들은 멀리 설산을 보고는 제각기‘장관이다’라고 소리친다.

우루무치에 도착하기 1시간 전 갑자기 풍광이 바뀌어 아름다운 초원이 나타났다. 삭막한 사막은 사라지고 초원에는 양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간간이 물이 흠뻑 고여있는 습지도 나타난다. 습지 주변엔 큰 나무들이 무성해 많은 그늘을 만들고 주변엔 꽃들도 만개해 있다. 아! 이것이 오아시스인가. 옛날 사막을 횡단하던 대열이 여기를 보고는 얼마나 기뻐했을까!
나무와 초원과 그리고 태양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이 있는 쉼터, 오랫동안 사막을 가로질러온 여행객들에게 이곳은 바로 낙원에 비유할 수 있는 곳 일게다.
저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아 정말 좋구나. 정말로 아름답구나.

우루무치 주변지역은 소금기가 묻어 있는 땅들이 많다.

강가엔 소금이 말라붙어 하얀 덩어리들이 보이고, 염분이 많은 호수에선 소금을 만드는 염장이 있었다. 육종용도 소금기가 많은 땅에 자라는 것은 잘 변질이 안되므로 일부러 소금기가 많은 강물에 씻기도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같은 사정을 아는 상인들이 중량을 늘리기 위해 염분을 가하는 것인 모양이다.
정확히 아침 10시에 우린 우루무치역에 도착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루무치에 도착하니 우루무치는 사라지고 없었다.

우루무치 없는 우루무치

‘아름다운 목장’이란 뜻으로 예부터 소와 양떼를 몰고 다니는 많은 유목민족들이 모여 살았던 초원지대인 우루무치는 사라지고 중국의 여느 도시와 같이 높이 솟은 현대식 건물과 복잡한 거리, 빵빵거리는 차들의 소음으로 가득찬 중국의 현대도시 하나에 우린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거리를 둘러보니 심지어 서울보다 더 많이 외국의 유명 옷 브랜드가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다.

시장을 둘러보니 건포도 ,어린애 주먹만한 크기의 왕대추, 그리고 한번도 보지 못한 과일들을 파는 가게와 유목민들이 좋아하는 각종의 칼들이 장식된 칼집과 함께 날이 시퍼렇게 선 채 팔리고 있어 여기가 위구르족 자치주인 신강성의 성도 우루무치인 줄 깨닫게 해준다.

저녁에 서커즈(石詞子)市에서 오신 진선생을 만났다. 진선생은 서커즈市 약재공사에서 육종용을 수집하는 사람으로 우리를 육종용이 있는 사막으로 안내해 줄 사람이다.
진선생으로부터 신강성이 의외로 다양한 약재가 나는 곳이고 육종용 쇄양은 물론이고 그 외에도 구기자, 홍화, 마황, 감초등의 특산이 있다는 것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신강성에서의 육종용의 산지는 石詞子가 50t으로 제일 많고 托里가 20∼30t 소수민족이 사는 古니圖가 10∼20 t 으로 도합 100여 t 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은 캐는 사람이 없어서 채취량이 점점 줄어든다고 한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우린 양젖을 발효시켜 만든 우유 같은 술에 취한 채 오랜만에 흔들리지 않는 침대에서 골아 떨어졌다.

사막의 땅속 1m 깊이에서 자라기 시작한 육종용의 싹은 연약한 아이보리색 비늘을 덮은 채 땅 표면을 향해 자라기 시작한다. 캄캄한 땅속에서 싹이 조금 자라면 다시 비늘이 덮이기를 반복하며 크기와 굵기를 더해간다.

매일 똑같은 일을 3년여를 한 다음에야 땅 표면을 뚫고 하늘을 향해 비상할 수 있다. 땅 표면에 도달한 순간 육종용의 머리부분에선 鱗甲의 사이로 하얀 꽃망울을 무리 지어 토해낸다.

 

그러나 그것은 곧 죽음의 시작이다.

꽃이 핌과 동시에 육종용의 내부는 구멍이 뚫리기 시작하고 그 사이로 육종용의 단물을 빨아먹으려는 벌레들로 인해 내부는 안에서부터 녹아내려 육종용의 흔적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육종용의 라이프 사이클은 바로 情事의 허망함을 보는 것과 같다.
오로지 한번 射精하기 위한 일념으로 살아가는 식물이 바로 육종용이다.
오로지 수컷의 성기만 달랑 달려있는 듯한 식물이 육종용이다.
채약꾼은 사정하기 전의 육종용만 약재로 쓴다.
땅이 마치 벤츠 자동차의 로고모양으로 솟아오를 때, 좀 야하게 이야기한다면 아침에 성기가 발기하여 텐트를 치는 모양으로 육종용이 땅을 텐트삼아 봉긋 솟아오를 때 채약꾼은 육종용을 캐낸다.
이미 땅으로 솟아올라 하얀 꽃망울을 토해내기 시작한 육종용은 채약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마치 정액을 토해내고 죽어버리는 자지의 비애와 닮았다.
石詞子市에서 老沙灣을 거쳐 우리는 마침내 고비사막으로 향했다.
사막을 가기 위해 일제 파제로 지프차에 한가득 생수를 싣고 거의 하루를 달려 사막으로 온 것이다.

날씨는 맑았지만 하늘이 낮아진 듯 태양은 따가웠다. 사막으로 가는 길은 비록 포장된 도로가 나 있었지만 70년대에 군인들이 건설한 도로라 요철이 심해 도로 사정이 엉망이었다. 육종용을 보기 위해 우리가 찾아가는 사막은 아직도 소금기가 계속 올라오는 땅이다.
간간이 물을 잡아 놓기 위해 미루나무를 촘촘히 심고는 그 안에 아무 데서나 잘 자라는 옥수수를 심어 놓았지만 소금기로 자라지는 못하고 있었다.
미루나무조차 보이지 않는, 도로가 끊어지는 지점쯤에서 회족식당이 있었다. 아마 사막의 초입에 해당하는 곳인가 보다. 실내에 들어서니 제법 시원하다. 사막은 태양만 피하면 금새 시원한 느낌이 들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건조한 사막기후의 특색인가. 회족모자를 쓴 주인장이 아주 먼 곳에서 온 듯한 이방인들을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반갑게 맞아준다.
진선생이 이미 우리 한국사람들의 식성을 파악한 듯 짬뽕국물에 비빈 것 같은 매운 국수를 시켜준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회족이라 양고기로 국물을 내었지만 제법 먹을만한 음식이었다. 이제 사막으로 들어가야 한다.마치 키를 넘는 강물에서 물장난을 하고 있는 듯 온 몸에 짜릿한 긴장이 감돈다. 그러나 도로를 벗어나 사막으로 진입하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우리를 인도하는 沙灣의 현지인도 사막은 까딱 잘못하면 길을 잃어버리기에 자신들도 웬만해선 도로에서 50km 이상은 벗어나지 않으려 한단다. 몇 해 전에 육종용을 캐러 사막으로 들어간 몇 사람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면서…. 파제로는 바퀴자국이 있는 듯한 곳을 골라 사막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사막에서 사막을 바라보니 땅덩어리의 끝을 보는 느낌이다. 아지랑이가 이는 듯 사막의 저 끝은 몽롱하다. 바다를 한참 바라보고 있노라면 수평선 저 너머가 가물가물해 지듯 사막 역시 지평선 저 너머가 가물가물해 진다.
저 끝 너머엔 또 무엇이 있을까?

 

한 20킬로미터쯤 들어갔을까 육종용을 캐는 현지인이 차에서 내려 주위를 살핀다.


육종용은 키가 1∼2미터쯤 되는 소소체 나무뿌리의 습기를 빨아먹고 자라는데 주변에 그 나무들이 많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미 6월에 접어들어 벤츠마크로 땅을 뚫고 올라오는 육종용을 발견하기는 어려웠고, 결국 우리가 발견한 것은 이미 꽃이 피어 속이 썩어 있는 육종용과 아직 땅속에서 내년이나 내후년쯤 땅 표면을 뚫고 올라올 어린 육종용뿐이었다.
우린 이미 사막에서 건조중인 육종용을 보아온 터라 크게 아쉬움은 없었다. 다만 육종용의 생과 사를 통해, 땅속에서 곁가지 없이 하나로 자라 올라오는 육종용의 통일된 기운이 補陽이란 약성으로 투영됨을 알 수 있었고, 그 약성을 유지하기 위해선 陰乾한 육종용이라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鎖陽

쇄양이란 약명을 곰곰히 생각해 보라.
대충 陽이 누설되는 것을 잠근다는 의미일 것이다.
자물쇠는 아주아주 귀중한 것을 보관할 때 주로 쓴다. 특히 옛날 자물쇠는 요즘 것보다 훨씬 듬직하고 믿음직했으리라. 듬직한 자물쇠로 우리 몸의 아주아주 귀중한 양기를 지키고 있는 약재라고 생각해 보라.
陽起石, 破古紙, 巴戟天, 淫羊藿 등의 약명이 주는 느낌과는 다르다. 이 약명들은 비록 정력제이지만 최음제나 흥분제의 느낌이 든다. 우리 몸을 흥분시켜 최대한의 기능을 발휘케 하겠지만 결국은 과다사용으로 우리 몸을 손상케 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약명들이다.

쇄양이라 자물쇠로 양기를 지켜준다. 色을 즐기는 남자에게라면 이보다 멋진 약재가 어디 있겠는가.
沙灣의 사막에서 육종용을 만난 뒤 우리는 다시 石詞子市로 돌아왔다.
중국의 변방이지만 위구르족의 풍습과 한족의 풍습이 적절히 조화된 약간은 이국적인 도시였다.
그러나 조용하고 깨끗했다. 하루를 쉬는 동안 진선생은 쇄양을 캐는 현지인을 수소문해 찾아왔다. 石詞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면서…
다시 물어본다. 몇 시간 걸려요. 6시간쯤 걸린다. 제기랄, 중국인들의 거리개념이라니….

자 다시 사막으로 출발이다

지금은 건기라서인지 마치 비 온 뒤의 하늘과 같이 아주 맑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걸려 있다.
6시간도 훨씬 넘어서 현지인 사내가 쇄양이 난다고 하는 곳까지 왔다. 땅은 회백색을 띠고 있고 건조해서인지 갈라진 틈이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건조한 땅에도 풀은 자라고 있고 그 풀을 뜯어먹는 양들이 군데군데 떼를 지어 있었다.
이렇게 척박하고 황막한 땅에도 생명들이 있구나. 현지인 사내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쇄양을 찾으러 돌아다녔다. 쇄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우리는 그 사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그 사내는 돌아오지 않았다.
진 선생이 답답한 듯 멀리 양치는 사람에게 찾아가 혹시 이 근처에 쇄양이 있는지 물어 본다.
양치는 사람은 주위를 몇 번 두리번거리더니 금방 찾아낸다.
“그렇지, 많이 삐대는 사람이 장땡이라니까”
쇄양 역시 白刺屬 식물의 가는 뿌리에 기생하는 식물이고 보통 땅속 50cm에서 1m 사이에서 자라 올라오는 다년생 식물이다. 우리가 처음 만난 쇄양은 그 주변의 땅 색과는 전혀 다른 정열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빨간 보랏빛이라고나 할까. 멀리서 보면 회백색의 땅위에 빨간 점이 찍힌 듯 불끈 올라와 있었다.
쇄양 한 뿌리를 캐다보면 그 주변에 아직 땅위로 솟아오르지 않은 2∼3개의 어린 쇄양을 건질 수가 있다.
한 곳에 여러 개의 씨가 떨어지다 보니 자연히 군락처럼 올라오는 모양이다.
조심스레 쇄양을 캐보면서 우린 쇄양의 형태가 너무나 페니스와 닮아 있음에 다시 한번 놀랐다. 송이버섯보다도 훨씬 더.
캐낸 쇄양을 일자로 잘라 단면을 보았다. 물을 응축하고 또 응축하면 이런 모습일까. 단면은 진액이 서려 있는 듯하다. 송이버섯은 소나무응달 습기가 많은 곳에서 자라 갈라지고 터지는 건조하고 마른 형태를 띠지만, 쇄양은 건조하고 척박한 양지에서 자라 마치 많은 양의 수분이 응축된 젤리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
이것을 보면 송이와 쇄양의 형태는 비슷하지만 약성은 판이하게 다를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윤형이가 쇄양의 단면을 한참 들여다 보더니만 “一陽이 六水에 갇혀 있는 모습”이라 한다. 그래서 쇄양인가?

아! 천산의 천지여

우루무치로 돌아와 우루무치시에 병풍처럼 걸려 있는 天山의 天池를 찾았다. 산밑은 3-40도를 오르내리는 뜨거운 날씨이고 산꼭대기는 만년설이 덮인 설산이다. 천지는 산의 중간쯤에 있는 어마어마하게 큰 호수이다. 이곳은 이 세상의 자궁과 같은 곳이 아닐까. 나의 전생, 아니 전생의 전생, 아니 그 훨씬 이전에 여기에서 태어났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천지에서 우린 양 한 마리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伊美特曲으로 술잔을 채웠다. 아! 꿈결같은 인생이여….

오후 다섯시 김단주의 은사님을 만나기 위해 다시 북제주로 돌아 왔다.

그러나 기실은 은사님이 우리를 안내한 곳은 7년째 유기농업으로 온주 밀감을 재배하시는 신부님 댁이었다.
아마 선생님께선 우리가 미리 설명을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밀감의 껍질을 진피로 생각하시고 정성 들여 귤을 재배하시는 신부님댁의 귤이 약용으로 적합하지 않겠냐는 생각에서 우리를 부르신 모양이었다. 그 댁에서 재배하는 귤은 껍질째로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제주도에 토박이로 계시는 분들도 산물에 대한 이야기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고 실제로 어디에 가야 산물이 있는지 아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결국 전문가 몇 분만이 산물의 존재와 위치를 파악하고 있는 정도이다.
육지에 있는 우리 한의사들이 이 정보를 모르는 것은 당연하겠지.

신부님 댁에서 비파열매로 담근 화채를 먹고 나오니 술시가 가까워졌다.
진피를 찾았다는 흥분으로 곁눈질로만 끝낸, 바다가 보고싶었다. 제주의 바다는 육지의 바다와 느낌이 다르다. 특히 어둠이 막 내려앉을 무렵, 비보라가 몰아치는 회색빛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내 가슴속에도 같은 모양의 파문이 인다. 흐느끼는 영혼의 모습일까.


고 선생을 채근하여 파도치는 바다가 보이는 횟집으로 가자고 했다. 예상대로 바다는 역시 회색빛 바다에 비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그날 밤새 무슨 소리를 지껄였는 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음울한 회색빛 바다의 잔영은 술 취한 내내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비는 깨끗이 그쳐 있었다. 어제 김 박사에게 들은 애월읍 상가리에 있다는 최고령의 산물을 찾아가기로 양단주와 미리 약속을 해 둔 터라 관덕정으로 나갔다. 애월의 상가리는 제주의 오래된 시골 마을이었다.
비온 뒤의 깨끗함이 제주의 돌담과 초가에 어울려 술에 쩔은 머리 속을 씻어주는 느낌이다. 근 한시간이나 수소문한 끝에 강할아버지의 댁을 찾을 수 있었다. 사백년의 고가에 13대째 살고 있다는 강할아버지의 집뜰에 그 나이만큼의 진귤나무 세 그루가 있었다. 1988년 북제주군수가 수령 350년을 보증하고 보호수목으로 지정해 둔 진귤나무다.

눈앞에서 진피의 원형을 대하는 감동이라니!

고목의 등엔 일엽초가 더불어 집을 짓고 있었다. 산물의 잎을 뜯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온주밀감의 잎보다 가는 편이고 잎끝이 뾰족하고 크기도 작은 편이다. 온주밀감의 잎이 두리뭉실하여 둔해 보인다면 산물의 잎은 날렵하고 또렷한 느낌이랄까. 온주밀감의 잎을 부비면 밀감의 냄새가 나지만 산물의 잎에선 밀감냄새가 나지 않는다. 대신 아득한 옛부터 우리의 약초로 우리와 삶을 같이 한 운명적인 냄새가 난다.

後記

그 뒤 중국의 남방지역을 돌아 다녀 보면서 귤에 관심을 갖고 여러 사람들에게 중국 진피의 원형이 무엇일까 하고 탐문하여 보았지만 아는 이가 없었다. 대부분 먹는 귤껍질을 진피로 이해하고 있었고 종간의 구별은 대수로이 생각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난 이런 제안을 하고 싶다.
산물 즉 진피는 우리나라 제주도에만 남아 있는 진피의 원형으로 보인다. 식용으로서가 아니라 약용으로 사용될 수 있는 귀한 약용자원이니 더 이상 베어져서 사라지기 전에 재배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유관단체에서 관심을 가진다면 일개 읍 정도 크기의 재배면적 만으로도 수출도 가능하리라 본다.

1998년 6월 12일 그 동안 숙제처럼 미루어 놓았던 진피의 원형을 찾기 위해 제주도를 방문했다.
육지에선 아무리 물어봐도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순천대 원예학과 교수님이 고흥반도에서 진피를 구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아무래도 진피의 고향인 제주도를 찾는 것이 옳을 것 같았다. 몇 달 전부터 제주도가 고향인 김단주에게 부탁하여 진피에 대해 알아보라고 부탁하던 중 마침 김단주로부터 은사 선생님이 진피를 찾은 것 같다며 제주도를 다녀가시라 한다.

오후 다섯시에 은사선생님을 만나기로 하였기에 시간이 남아 진피에 대해 좀더 체계적으로 조사해 보기 위해 제주대학의 원예학과를 찾았다. 제주대학의 원예학과에서는 반드시 귤나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고 생각되어 찾아보았다. 대학에 도착하니 백 교수님을 소개해 준다.
만나 뵈니 백발이 성성한 노교수님이시다.
백 교수님으로부터 진피의 현지 이름이 ‘산물 ’이라고 들었다.

산물, 산귤, 진귤 등으로 불리지만 현지인들에겐 ‘산물’ 로 통하고 있었다. 백 교수님은 다시 제주 감귤연구소의 김 박사를 찾아가면 더욱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며 소개해 준다. 김 박사님은 귤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으신 분이라 이간의 내막을 잘 알고 있다고 하신다.

 

급한 마음에 바로 차를 몰아 서귀포로 넘어갔다.

5.16도로엔 간간이 뿌리는 비로 자욱한 안개가 끼어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남제주군 남원읍 하례리에 위치한 감귤연구소의 앞뜰엔 각종 귤나무의 표본들이 심겨져 있었다.
김 박사님은 귤나무의 박사답게 그동안 궁금해 왔던 의문을 일시에 풀어주었다.

우리가 약용으로 쓰고 있는 귤나무를 학명으로 구분하여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진피 Citrus Sunki – 산물, 즉 진귤나무의 과피

애월읍의 상가리, 납읍리, 명월리, 어도리, 토평리 등  마을에 집안에 오래된 나무들이 심겨져 있다. 많은 나무들이 베어져 버려 그 숫자가 극히 적다. 음력 10월에 채취한다.

 

청피 C. nippokoreana – 청귤나무의 미숙한 과피

청귤나무는 12월이 되어도 과피가 청색이다. 그러나 현재 청귤나무에 대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으므로 존재가 거의 파악되지 않고 청피도 채취되지 않는다. 청피는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데 이것은 귤나무의 미성숙한 과피를 벗겨 말린 것으로 엄밀한 의미의 청피와는 다르다.

 

# 참고 – 중약감정학의 내용을 인용하면 청피는 귤 및 재배시 변종된 귤의 미성숙한 과실의 건조된 외층의 두꺼운 과피를 지칭하는 데 보통 5-6월에 채취하거나 아니면 떨어진 낙과의 과실을 취해 꼭다리에서 십자형으로 갈라 벗긴 껍질을 건조하여 말린 것이라 하였다.

 

지각 Aurantii Pericarpium – 광귤나무의 미성숙한 과실을 잘라서 건조, 우리나라에선 탱자의 과실도 지각으로 사용된다. 일본에선 등피라고 명명.

 

당유자 C. grandis – 현지에선 댕유지로 불림, 진피의 대용으로 사용됨.
그러나 유자의 껍질은 두껍고 味甘하여 진피의 味가 辛苦함과 서로 달라 같은 약작용이 있다고는 볼 수가 없다. 음력 7.8월에 수확하여 말려서 사용되나 껍질이 두꺼워 말리기가 어렵다.

유자 C. junos – 전남 고흥반도에서 주로 재배됨. 유자차를 만드는 원료로 쓰인다.

온주밀감 C. unshiu –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고 있는 감귤

원칙적으로 진피가 아니나 현재 모두가 검정해 주지 않는 사이에 진피로 둔갑되어 사용되고 있다. 밀감의 껍질은 재배시에 농약이 많이 사용되는 관계로 약용으로 쓸 경우 세척에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1911년 일본에서 들어온 이후 여러 개량종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온주밀감은 수확시기에 따라 조생종 – 추석 전에 수확, 중생종 – 조생종과 만생종의 중간에 수확, 만생종 – 아주 늦게 12월경 수확 등으로 구분되는 데 만약 온주밀감의 껍질을 약용으로 쓰자면 만생종의 과피를 써야한다고 한다. 조생종, 중생종, 만생종은 열매, 잎, 껍질의 모양이나 맛도 조금씩 틀려 아는 이는 금방 구별해 낼 수 있다고 한다. 그 밖에 금귤, 홍귤, 잡감, 하귤 등등 귤나무는 여러 종류가 있다고 한다.

청이형이 한국에 잠시 다니러 왔을 때 죽력 1병이랑 진피 1근을 선물했다.
늦은 나이에 이국에서 한의사로서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그에게 뭔가 특별하고도 강한 무기를 쥐어주고 싶었다.
마치 그의 노랫가락처럼 돈키호테 같은 인생을 살아온 그이지만 한의사로서의 새로운 출발은 또한 많은 어려움이 있으리라. 죽력 1병과 진피 1근이 무어 그리 그에게 큰 도움이 되겠냐만은 한의사 생활 십 수년에 내가 갖고 있는 부적과도 같은 내 마음의 인사였다.

학창시절부터 사람을 좋아하고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습성 때문에 술은 늘상 나에게 마시냐 아니면 참느냐의 문제를 제공하곤 했다. 그 결과 이젠 몸이 점점 망가져 술병이란 이렇게 오는구나를 직접 체험한다.


한의사의 강한 무기로 부적처럼 건네줄 정보로 진피를 중히 여기는 것은 오로지 몸으로 느낀 경험에서다. 과음한 뒷날 머리와 몸뚱이가 따로 놀며 속이 거북하고 가스가 가득 차 방귀도 안되고 트림도 안되며 뱃속이 오로지 혼돈 속에 빠져있을 때 나는 진피를 차로 달여 먹는다. 진피일물탕이다. 한잔을 마시고 또 한잔을 마시고 몇 잔의 지나면 머리가 맑아지고 뱃속이 평정된다.

많은 약재를 달여 먹어 보지만 진피만한 것이 없었다. 진피를 달여 먹으면서 술병의 최고의 처방이 대금음자임을 알게 되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처방이다. 한의과 대학을 졸업하면 누구나 대금음자를 술병에 쓴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막상 임상에서는 대금음자를 쓰지는 않는다.

군약이 진피3돈인데 시중에 도는 귤껍질을 주약으로 삼기가 뭣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시중에 도는 귤껍질을 진피를 달여 먹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리가 진피를 빼고 기병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기체, 기울, 기통, 중기 등등 각종의 기병에 진피가 들어가지 않는 처방은 몇 되지 않는다. 동의보감에 귤피 1량으로 일체의 기체, 기결을 풀어낸다는 귤피일물탕을 들지 않더라도 진피 하나만 바르게 쓴다면 질병의 절반정도는 해결할 수 있겠다는 말이 과장만은 아닐 것이다.


제주도 사람들에게 ‘산물’은 대단한 의미이다. 기록에 의하면 일본의 문헌인 비후국사에서   삼한에서 귤을 수입했다는 기록과 고사가 일본 서기에 지금의 제주도인 상세국으로부터 귤을 수입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제주도에선 삼국시대 때부터 귤을 재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물’은 오랜 세월동안 제주도에서 자생해온 재래종 귤나무의 일종으로 보인다. 예로부터  신기한 과일로 조정에 진상되어 왔고 껍질은 뛰어난 약재로 중국에까지 수출하였다고 한다.
예전에 제주도에선 집안에 귤나무가 있다는 것은 곧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연배가 드신 제주도   어른들에게‘산물’이 무어냐고 여쭈어보면 대개가 아신다. 어릴 적 한두 번은‘산물’의 신세를 지고 병이 나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소감소체를 떠나 여러 잡병에 이르기까지‘산물’의 껍질은 당장 아쉬운 구급약으로 또는 민간약으로 제주도 토박이 분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