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지는 동우당 제약회사 도라지 재배단지를 떠나 산을 내려가다가 발견됐다. 사과배 과수원 옆의 길섶에 있었다.
“원지다!” 신민교 교수(원광대)가 소리질렀다. 하얀 운동화를 신은 그의 발목에 원지가 감겨있었다. 원지는 이슬을 머금은 채 길섶에 비스듬히 나와 있어 마치도 아름다운 처녀가 수려한 팔을 내민 듯한 모습이다. 신 교수는 귀한 약초라고 반기면서 정성들여 촬영한다.

자연이 만든 것치고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어긋나는 줄칼 모양의 사선으로 뻗은 기다란 잎사귀며, 보라빛의 앙증맞은 꽃, 대가 가늘지만 단단하게 생겨서 청초하고 산뜻한 느낌을 준다. 신 교수는 이 약초의 뿌리를 원지라 하며 거담제, 강장제, 강정제로 쓴다고 했다.

원지의 한자를 물었더니 누군가 遠志라고 써주었다. 중국 약초사전을 들추어보았더니 원지는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성심장(醒心杖), 극완(棘완), 12월화(十二月花), 산호마(山胡麻), 양초(陽草), 소초(小草)… 원지는 익지강지(益智强志)한다하여 오래도록 뜻을 간직한다는 뜻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약초는 낯설지만 이름은 무척 눈에 익었다. 중국에서는 遠志라는 상호를 즐겨 쓰기 때문이다. 원지공부홈페이지, 남경원지회사, 북경원지광고 유한회사, 광주 원지 과학기술개발 유한회사, 절강 중의학원, 원지인터넷… 모두 약재와는 아무 관계없는 회사들이다. 다만 단어의 뜻에 의해 지어진 이름이다.

원지는 이름의 의미 때문에 약초를 초월한 상징의 뜻으로 쓰인다. 삼국시대에 촉국 장령 강유의 모친이 적군에 체포됐을 때 강유는 어머니에게 원지와 당귀(當歸)를 사서 보냈다. 遠志는 큰 뜻을 의미하고, 當歸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뜻이다. 강유의 모친은 애국의 큰 뜻을 이루고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하는 아들의 뜻을 곧 알게 된다.

원지의 의미는 그의 또 다른 이름 소초(小草)와 대비되면서 더 깊은 의미를 나타내는 모양이다. 남조 때의 저서 《세설신어》에 의하면, 동진 때에 사안이라는 은둔자가 있었는데, 조정에서 귀순하라고 여러 번 권고했지만 매번 거절했다. 후에는 웬일인지 저절로 산을 내려 환온의 사마관이 되었다. 어느 날 환온은 누군가 보내준 원지를 보고 사안에게 이 약초를 왜 원지라고도 하고 작은 풀이라고도 하느냐고 물었다. 중국말로 小草는 작은 풀이라는 뜻이다. 이 때 곁에 있던 대신 학융이 대답했다.

“이는 이해하기 쉬운 문제입니다. 처측위원지, 출측위소초, 즉 산에 머물러있으면 원지요, 떠나면 풀입니다. 은둔하면 원지이고 산을 내려오면 풀이 되는 거지요.”
학융의 교묘한 풍자에 사안은 곧 얼굴을 붉혔다고 한다.

遠志라는 두 글자의 의미를 새겨보며 문뜩 소기골 주변의 산을 두리번거린다. 하얀 비석으로 된 은둔자를 찾는다. 하얀 두루마기를 날리며 이 길 옆의 사과배나무 속으로 하얗게 사라지는 노인의 뒷모습을 보는 듯 하다. 지금으로부터 80여 년 전에 이 소기골에서 사과배를 재배해낸 최창호 노인이 그야말로 학융이 말한 원지가 아닐까 싶다.

1921년에 20대 초반의 최창호는 동생이 북한 고향에서 가져온 과일접수지(접穗枝)를 3년생 돌배나무 여섯 그루에 접목했다. 이듬해에 세 그루가 죽고 세 그루가 살았다. 7년째 되던 해에 세 나무에서는 전에 보지 못한 과일이 달렸다. 먹어보니 무척 달콤했다. 사람들은 이 이상한 과일을 ‘참배’라고 부르다가, 후에는 ‘사과배’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다.

그는 한학에 정통한 학자로서 부친과 함께 《광영학교》를 꾸려 반일지사를 양성하고 약국을 꾸려 마을사람들의 병을 봐주었다. 하지만 광복 후 토지개혁 때에는 재산이 있다는 이유로 부농(富農)으로 획분(劃分) 된다. 공작대들에 의해 재산을 몰수당하고, 도끼에 박산이 난 아버지의 비석조각들을 이른 새벽에 땅속에 파묻으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게 된다.

사과배는 이 작은 소기골에서 중국 전 지역으로 퍼져나가고, 구 소련, 체코, 북한 등 14개 나라로 퍼져나갔다. 용정시 정부에서는 1989년에 소기골의 세 그루 母樹에 ‘사과배 선조 기념비’를 세워 그 역사와 공적을 기리었다. 1990년에는 중국 전 지역 과일 평가회의에서 당도가 가장 높은 과일로 평가되어 중앙 권위부문으로부터 ‘배 중의 왕’이라는 월계관을 쓰게 되고, 1995년에는 소기골이 속해있는 용정시가 ‘중국 사과배 고향’으로 명명된다.

사과배는 약효가 좋아서 어렸을 때 기침을 하면 어머니가 사과배의 속을 파고 그 속에 꿀을 넣어 솥에 쪄서 먹이곤 했다. 밤을 자고 나면 가래가 삭고 기침이 수그러들었다. 버섯냉채(무침)나 냉면에도 사과배를 얇게 베어서 넣곤 한다.

사과배는 모양이 사과 같기도 하고 배 같기도 해서 사과배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모양은 사과이나 먹으면 배 맛이고, 딸 때는 사과같이 불그레하나 움에 저장하면 배같이 노랗다.
우리는 사과배가 중국 조선족이라는 이름의 우리 자신을 닮았다고 한다. 고국의 문화를 중국 본토문화에 접목해 태어난 문화, 고국의 전통문화를 지켜가며 중국문화에 적응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족은 해외 한민족 중 우리 말, 우리 글을 망라한 전통문화를 가장 잘 지키고 있고, 중국 55개 소수민족 중 교육수준이 가장 뛰어난 민족이다. 세계 50여 개 나라에 나가서 억척스레 일해 경제력을 키우고, 한중수교의 동풍을 타고 재빨리 중국 연해주 대도시에 나가 삶의 새 터전과 공동체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사과배에는 고국에 대한 깊은 망향의식과 생명의 큰 뜻이 담겨져 있다.

거의 한 세기를 낯설은 땅에서 풍운변화를 겪으며 드디어 중국의 ‘배 중의 왕’이 된 사과배, 130년에 걸쳐 중국에서 우수한 민족으로 선 조선족이다.
소기골에서 빗물을 머금고 청초한 모습으로 서있는 원지를 보며, 사과배 모수 세 그루를 떠올리고 최창호 노인을 떠올리고 우리의 삶을 떠올리게 된다.

약초 답사 팀을 안내하는 농부차림의 50대 장년을 나는 찬찬히 살펴보았다. 한족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한족 티가 나지 않았다. 유창한 연변 조선말 방언을 썼고, 웃는 모습이나 예의를 차리는 모습 모두가 조선족이다.

그의 집을 보았지만 집 역시 조선족이다. 우선 지붕이 책을 엎어놓은 듯이 각이 난 한족 식이 아니고 동그스름하게 벼 이엉을 한 조선족 식이다. 집 구조를 보면 함경북도 식의 온돌이다. 정주와 방이 있고, 정주에 부엌이 딸려있고, 부엌 우에는 구들과 같은 수평선에 널 장판이 깔려있다. 그 옆방은 옛날에 우사(牛舍)나 방앗간으로 사용했을 것 같은 창고가 딸려있다.

우리는 늘 머릿속에 하나의 프로그램이 입력돼있다. 56개 민족이 살고 있는 다민족국가이기 때문에 낯선 사람을 보았을 때는 어느새 ‘우리 민족이냐 타민족이냐’ 라는 프로그램이 작동된다. 무의식은 클릭을 하거나 말거나 자기 프로그램대로 돌아간다. 의미가 없는 때가 대부분이지만 무의식이 하는 일이니 어쩔 수가 없다. 타인을 통해 자기를 인식하는 소수민족의 생존본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민족만 단일하게 사는 고국에 가서도 이 프로그램이 작동해 혼자 실소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굳이 한족이냐 조선족이냐 라는 프로그램이 작동된 이유를 따진다면, 도라지는 조선족만이 즐겨 먹는 나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문화적인 의미에서 보면 도라지는 중국에서 조선족을 상징한다. 길림시에 우리 조선족의 문학지 《도라지》가 있는데, 이 잡지의 중국어이름을 길경(桔梗)이라 하지 않고 굳이 우리말의 음을 따서 《道拉吉》(또우라지)라고 쓴 것도 도라지의 깊은 문화의미를 살리기 위한 것일 것이다. 몇달전 길림 CCTV에서 《도라지와 조선족》이라는 제목으로 조선족을 소개하는 프로를 만든 적이 있는데, 이 프로에서 도라지에 관한 조선족의 전설, 민속, 민요, 전통 무용, 요리가 소개되었었다.

약초 답사팀 일행이 그의 집 뜰에 들어서자 환영식이나 하듯이 개 세 마리가 일제히 짖어댔다. 그 소리에 놀랐는지 게사니(거위) 두 마리, 이웃집에서 마실 온 닭 몇 마리도 동참하며 소리를 질렀다. 개들은 한 마리는 우사(牛舍)에, 한 마리는 대문 어귀에, 한 마리는 집 뒤뜰 배나무 옆에 각각 집을 가지고 있었다. 두 마리는 검은 판에 흰 얼룩이 예쁘게 간 얼룩개고, 한 마리는 풍산개 모양으로 털이 새하얀 아줌마 모습의 개였다.

워낙은 이 집 20마리 황소의 보초병들인데, 소들이 거의 산에서 자라기 때문에 별 볼일 없이 한가하기만 하단다. 아직도 산골인정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평화로운 동네여서 소를 도적맞을 염려가 없다. 동네의 소 수백 마리도 다 산에서 혼자 풀을 뜯으며 자란다고 한다.

그의 집 뒤뜰 살구나무에서는 살구가 한창이다. 해마다 혼자 익고 혼자 떨어지기를 되풀이하고 있다고 한다. 일행은 빗물이 잎사귀에 고여 후둑후둑 떨어지는 살구나무아래에 서서 곱게 익은 살구를 따서 먹었다. 자기 손으로 따서인지 별맛이었다. 사닥다리에 올라서서 살구를 따서 손님들에게 주는 그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이름은 정유국(程維國), 올해 53세다. 아버지는 산동 태생으로 젊어서부터 북한 신의주에서 가서 해삼, 고등어 등 수산물 무역을 하다가 광복이 난 후 1947년도에 중국 연변으로 들어왔다. 정유국씨는 가정의 영향을 받은 데다가 조선족 위주의 동네에서 살다보니 점차 모습, 생활방식까지도 조선족이 돼간 것이다. 그는 조선족처럼 도라지나물을 양념에 무쳐 즐겨 먹는다고 한다.

소기골은 개혁개방 전에는 조선족 160호에 한족은 5호 뿐이었다. 지금은 조선족 60호, 한족 15호라고 한다. 개혁개방을 거쳐 조선족의 거주 판도가 변해가고 있다. 동북 3성에만 살고 있던 조선족인데 현재 20여만 명이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을 따라 연해주로 이주하고, 한국에 16만, 기타 미국, 일본 등 50여 개 나라에 수만 명이 유학 또는 돈벌러 나갔다. 그 물결에 실려 이 동네의 조선족도 100여 호가 이주한 셈이다.

정유국 씨는 일찍부터 산도라지를 캐서 팔곤 했다. 본격적으로 재배를 하기 시작한 것은 1985년. 산도라지가 많아 큰 규모를 이루지 못하고 작은 면적에 도라지재배를 하다가, 1992년에 한 헥타르 정도 심었다. 전부 염소 배설물로 된 농가비료를 쳐서 도라지는 건강하게 잘 자랐다. 1995년부터는 여러 사정으로 2천 평방미터에 도라지를 재배했다. 올해에는 3천 평방미터에 도라지를 심었는데 후년 9월이면 수확한다고 한다. 그는 한국 동우당 제약회사에 도라지를 팔곤 했는데, 도라지가 깔끔하고 질이 좋은 것이 인연이 되어 동우당제약회사의 도라지재배 관리를 맡게 되었다.

올 4월말부터 동네의 조선족가정 10가구, 한족가정 5가구를 인솔해 5만 평방미터에 도라지 씨를 뿌렸다. 소기골의 땅은 질 좋은 사토질이어서 도라지재배에 아주 적합하고 한다. 도라지 씨를 뿌리는 쟁기를 보니 갈쿠리 모양으로 생겼다. 도라지가 싹이 돋고 풀이 올리 밀자 호미로 기음을 맸다. 닭, 소, 돼지의 변으로 된 비료는 겨울과 봄에 낸다고 한다. 지금은 도라지가 작아서 농가비료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첫해에 관리를 엄하게 하면 이듬해부터는 도라지가 건실하여 쉽게 관리할 수 있습니다. 첫해에는 기음만 해도 4,5 차 정도 매줘야 합니다” 라고 했다.
그는 방풍, 황기, 시호, 더덕 등 약재들도 재배했었다고 한다. 그의 집 뜰 안에는 백양나무 묘목과 도라지가 가득 자라고 있다. 해마다 백양묘목을 팔아 상당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 1995년도에는 염소 수백 마리를 사양해 미국적 한국인을 통해 북한에 수출하기도 했다.

그의 집 문 앞에는 포도넝쿨을 닮은 식물이 뒤덮여있다. 꽃은 잎사귀보다 연한 연두빛, 이파리가 열댓 겹으로 감싸안고 올리 피었는데, 모양은 엄지손가락 두 개를 마주 붙인 것만큼 통통하고 기름하다. 아버지가 30년 전에 수 천리 밖의 공주령에서 옮겨온 맥주꽃인데, 맥주공장에서는 이 꽃을 넣어 맥주 맛을 낸다고 한다. 맥주꽃이 식도건강에 좋다고 그의 집 식구들은 매일 차처럼 마신다고 한다.

“명년에 새집에 놀러 옵소예! 땅 만 2천 평방메다를 사 놓구, 새집 지을 단도리두 다 했습꾸마” 라고 연변사투리를 하며 환하게 웃는다.
자연의 순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 그의 얼굴에서 9월에 산을 물들일 보라빛 도라지꽃을 본다.

도라지 관리원 정유국 씨의 집 대야에 마치현(馬齒현)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잎사귀는 떼고 줄기만 손가락만큼한 크기로 잘라서 데쳐낸 것이다. 처음에는 고사리줄기를 따놓은 줄로 알았다. 줄기가 통통하여 고사리를 닮았다. 정유국 씨는 마치현을 기름에 볶아서 요리해 먹는다고 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약전(藥典)≫에 의하면 마치현은 열을 내리고 습을 없애고 부기를 내린다. 마치현은 악창(惡瘡)에도 좋은 외과 약이라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당나라 의학가 맹선(孟詵)은 마치현 찹쌀 죽으로 ‘기가 통하지 않아 생기는 설사나 창병’을 치료했다고 한다. 현대의학이 증명한데 의하면 마치현은 피부염, 각막염, 결합막의 정상기능 회복, 야맹증 등에 좋고, 위궤양, 십이지장궤양, 구강점막궤양 등에도 좋다고 한다. 또 임파결핵궤양, 급성맹장염, 산후열 등도 치료한다고 한다.

마치현을 민간에서 우리말로 ‘도덕풀(도적풀)’ 또는 ‘돼지풀’이라고 불렀으므로 나도 그렇게 불러왔다. 땅에 넝쿨을 뻗으며 기어가듯이 붙어서 자란다고 ‘도적풀’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이 붙었는지 모를 일이다. ‘돼지풀’이라는 이름은 돼지가 좋아해서 생겨난 이름일 것이다. 한국에서는 쇠비름으로 부르는 모양이다.

마치현은 잎사귀가 큰 물방울모양으로 갸름하고 통통하고 줄기가 기름지고 탄력이 넘친다. 넝쿨처럼 옆으로 뻗었으므로 위로만 솟은 다른 식물처럼 따분하지 않고 개방적이다. 마치현의 잎사귀 모양이 말 이빨처럼 생겼다고 마치현이라고 불렀을 것이지만, 그 이름은 마치현의 귀엽고 예쁜 모양에는 손색이 가는 이름이다.

마치현은 이름이 수십 가지라고 한다. 어떤 곳에서는 마치현의 모양이 귀여워서 ‘팡와와(방娃娃<방와와>)’, 즉 ‘포동포동한 아기’라고 부르고, 어떤 곳에서는 마치현이 아무리 바람이 불고 태양이 쬐여도 쉽게 시들지 않는다고 ‘장수초’, 또는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심불감(心不甘)’이라고 부른다.

마치현은 색깔이 푸른빛인가 하면 자주 빛이 섞여있고, 이렇게 볼 때는 푸른빛이고 저렇게 볼 때는 자주 빛이다. 그래서 마치현은 ‘오행초’ 또는 ‘오방초’라고 부르기도 한다. ‘잎사귀는 청빛, 줄기는 적색, 뿌리는 백색, 씨는 검은 색’이기 때문에 목화토금수 오행색을 상징한다고 한다.

또 전설에 의해 ‘태양초’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하늘에 해 열 개가 동시에 떠서 강바닥이 갈라 터지고 곡식이 말라죽게 되었다. 후예라는 용사가 나타나 해들을 하나하나 쏘아 아홉 개를 떨구었다. 열 번째 태양은 마치현의 잎사귀에 숨어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된다. 그리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해는 마치현의 구명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아무리 무더운 여름철에도 마치현에게만은 불벼락을 쏟지 않아 마치현이 늘 싱싱하다고 한다. 그래서 마치현은 또 ‘보은초(報恩草)’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동네에는 조선족이 적고 한족이 대부분이었다. 조선족은 단층 줄집에서 살았고, 한족들은 청나라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여 검은 기와를 얹은 독집, 독 울안에서 살았다. 한족 집의 높은 대문을 열면 뜰 안에는 가득 마치현이 널려 있곤 했다.

다른 풀들은 자르거나 뽑아놓으면 금방 시드는데 마치현은 수일이 지나도 싱싱하고 기름졌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소꿉놀이를 할 때면 마치현이 늘 요리로 오르곤 했다.
한족들은 옛날부터 마치현을 야채로 취급해왔다. 여름과 가을이면 그들은 마치현의 뿌리를 자르고 깨끗이 씻어 끓는 물에 데쳐낸 후, 물기를 빼서 소금, 식초, 간장, 생강즙, 마늘즙, 깨 기름에 메워서 먹는다.

또는 마치현을 밀가루에 섞어 지짐이를 구워서 먹거나, 마치현소를 넣고 기름떡을 하거나 보우즈[包子]를 빚어서 시루에 쪄 먹기도 했다. 일부는 말려서 저장했다가 음력설 음식인 죠즈[餃子]를 만들어 먹곤 했다.

음력설에 먹는 죠즈(물만두)는 한족들에게 있어 경건한 음식이다. 해마다 한번씩 마을에 와 사람을 잡아가는 연(年)이라는 귀신을 쫓고나서 사람들은 설을 쇠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설을 쇤다는 말을 중국말로 과년(過年)이라고 한다.

말발굽모양으로 만든 죠즈에는 새해에 부자가 되라는 소망이 스며있다. 죠즈를 많이 먹을수록 돈을 많이 번다고 하여 한족들은 음력 그믐날 밤 12시에 온 가족이 모여 죠즈를 먹는다. 이처럼 중요한 음식에 마치현소를 넣은 것을 보면 마치현은 민간에서 길한 식물이다.
하지만 도시의 식탁에서는 마치현을 볼 수 없다. 층집이 높아갈수록 인간은 마치현을 망라한 자연을 멀리하게 된 모양이다.

정유국 씨는 장춘(길림성 소재지)에서 열린 동북삼성 농업박람회에 뉴질랜드에서 수입한 마치현이 전시돼있더라고 하면서, 약초로도 좋지만 건강에도 좋은 요리감이라고 했다. 중국에서 자라는 마치현은 땅에 붙은 채 넝쿨모양으로 뻗어 수확하기 불편한데, 뉴질랜드에서 수입한 마치현은 부추처럼 곧게 자라서 낫으로 수확하기 좋을 것 같더라고 진지하게 말했다.

언젠가 마치현의 시대가 오지 않을까? 우리의 식탁에 한자리 굳힌 부추나 시금치, 홍당무처럼 말이다. 수입품으로까지 나타나고 있으니 국제적으로도 상당한 가치를 과시하고 있는 듯싶다. 또 마치현이 수입품으로 나타나기까지 우리가 얼마나 마치현을 멀리했는지를 한번 생각해볼만한 일이다. 마치현과 마치현들이 가득한 생명의 자연을 말이다.

마치현에 대해 우리 연변말로 ‘도적풀’이나 ‘돼지풀’이라고 했던 이름부터 고쳐야 할 것 같다. 인간에게 너무 큰 혜택을 주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인간의 깨달음에 달린 일이다.
약초는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깊은 계시이다. “자연에 겸허하게 머리 숙이라, 마음을 열어라, 귀를 기울이라”고 마치현은 말하고 있었다.

차는 소기골을 떠나 용정방향으로 달렸다. 약초 촬영이 끝나고 정유국 씨의 집 울타리를 나서자 멈추었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차창가로 흘러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일행은 하늘에 감사했다. 차는 동으로 달려 동불사를 지나고 조양천을 지나 해란강이 보이는 용문교에 들어섰다.

용정은 광복 전에 우리 조선족의 문화중심 및 해외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 가장 먼저 이 땅에 이주한 사람은 장인석, 박윤언이란 농민이었는데, 그 때가 1884년이다. 그들이 버들과 갈대를 베고 불을 질렀던 흔적이 해란강반의 저 넓은 들에 남아있을 것이다. 1906년에는 이름난 애국 투사 이상설, 이동녕, 왕창동 등 인사들이 ‘세전서숙’을 꾸려 해외 반일교육의 장을 열었고, 1919년에는 3.1운동의 연장선인 3.13운동이 일어나 해외 반일 독립운동의 열기를 고조시켰다.

길옆으로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유서 깊은 용정우물이 스쳐 지난다. 장인석, 박윤언이 처음 발견한 것으로 한밤중에 집안이 환하여 바라보니 우물가에 서기가 피어나면서 용이 승천하더라는 전설의 우물이다.

차가 용정에서 5분 정도 더 달리자 해란강가에 세전벌이 끝이 보이지 않게 펼쳐져 있다. 울퉁불퉁한 곳도 없이 융단을 편 듯이 반듯한데, 미풍에 푸른 벼가 넘실댄다. 차를 타고 세전벌을 지나칠 때마다 나는 ‘백여 년 전 살길을 찾아 헤매던 우리의 선조들이 이 땅을 보고 그 얼마나 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으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넓고 부드럽고 아름답게 펼쳐진 땅이다. 비가 내리고 있어 7월의 논밭은 한결 푸르다.

한국 동우당제약의 옴니허브 약재작업장은 세전벌의 태평촌 중심에 위치해있었다. 비닐지붕아래 구멍이 숭숭한 채발로 된 선반에 깨끗하게 정리된 야생 도라지와 사삼, 가시오갈피가 가득 널려있다. 그 옆 기계소리가 나는 건축물은 약재 건조실이었다. 나무로 불을 때고 풍구를 통해 열을 바람으로 순환시켜 약재를 말린다고 했다. 비닐지붕에 내리는 빗소리가 가락 맞게 들려오고 약재의 특유한 향기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주변에는 보라빛 술을 드리운 옥수수가 한창이고 울타리에는 통통한 唐콩이 가득 매달려있다.

약초 아바이 최진만씨옴니허브 작업장에서 약재를 돌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올해 66세, 씩씩한 모습이 무척 건강해 보였다. 그는 지금까지 몸에 아무런 병도 없다고 한다. 그야말로 자연의 최대 혜택을 받은 것이다. 그의 약초인생이 건강을 만든 것이리라.

최진만 씨는 청년시절부터 약초에 대한 애호가 각별했다. 약초공부를 할 여건이 안돼 약초에 관한 책들을 읽으며 자습했다. 산을 돌아다니며 책에서 본 약초그림과 대조해 틈틈이 약초를 익혔다. 한 약초는 반드시 세 번 확인과정을 거치곤 했다. 그림에 따라 약초를 찾고, 봄에 싹이 돋은 모습, 꽃이 핀 모습, 가을에 열매가 달린 모습을 비교해서 책에서 본 약초임을 확인했다. 약의 성능은 반드시 책의 설명에 근거해 자신이 먹어보며 익혔다.

그는 용정시 광신향 용지촌에 살고있었는데, 30대 초반인 70년대부터 약초재배를 하였다. 그 때 마을에는 위생소(衛生所, 지금은 향병원임)가 있었는데 최진만 씨는 그 병원의 제약일꾼이었다. 병원의 직원은 총 4명, 의사 1명, 보조의사 1명, 약제사 1명, 제약일꾼 1명이었다.

70년대는 ‘문화혁명’ 시기이다. 이른바 ‘문화혁명’이라는 것은 1966년부터 10년간 모택동이 반대파를 숙청하는 운동을 일으킨 대동란(大動亂)을 말한다. 모택동은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10대 중학생들인 ‘홍위병’ 백만 명을 북경에서 수차 접견했다. 그들은 모택동의 기치를 들고 곧 거리로 뛰쳐나가 모택동의 반대파인 국가 주석 유소기를 저택에서 끌어내 타도하고, 중앙 총서기였던 등소평을 타도하고, 모든 높고 낮은 집권자들에게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집권파’라는 패쪽(작은 흑판모양의 나무 간판에 죄명을 적어 목에 걸게 함)을 메우고 고깔모자를 씌워 조리돌림을 하여 타도했다.

이 시기에 용정현 위생국 국장이었던 사람도 조리돌림을 당하고 이 마을에 노동개조하러 쫓겨왔다. 국장은 의사출신이라 초가 하나에 위생소 패쪽을 달고 의사로 복무하게 되었다. 하지만 쌀독이 빈 며느리모양으로 약이 없어 의사노릇을 할 수 없었다.

문화혁명 때문에 중국의 경제는 마비상태고, 병원마다 약품창고가 바닥이 나 있었다. 병원에서 진찰 한번 받으려면 새벽부터 줄을 서야 했다. 교통이 불편해 소수레를 타거나 도보로 수십 리를 걸어서 병원에 찾아오곤 했다.

농민들은 죽을 정도가 아니고는 병을 보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른바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집권파’이긴 해도 용정 위생국 국장이었던 의사가 이 마을에 나타난 것은 농민들에게 그야말로 큰 은혜였다.

당시는 이른바 ‘합작의료’ 시기여서 해마다 농민들에게서 20원 정도(한화 3천원에 해당함)를 거두고 평소에는 무료로 치료했다. 농민들이 지불한 합작의료비로는 어림도 없다. 약재의 원가를 최대한 낮추어야 한다. 국장은 약재를 심고, 약을 만들기로 했다. 연변에서 나지 않고 남방에서 나는 약재는 농민들이 지불한 돈으로 사들였다. 국장은 역시 국장이었는지라 병원에 사정하여 고압 솥을 얻어왔다. 제약설비를 갖춘 것이다. 그 때로부터 최진만 씨는 이 위생소에 약재를 제공하는 약초 관리원 겸 제약일꾼이 되었다.

최진만 씨는 밭에 원지, 용담초, 시호, 방풍, 황기, 오미자, 구기자 등 수십가지의 약초를 심었다. 고압솥에 익모초와 생당쑥을 달여 익모초환을 만들고 승마, 용담초 등에 계피를 섞어 달여서 감기약을 만들고, 부족한 약재를 약방에서 사다가 십전대보환, 보신환 등 환약을 만들었다.

연변농학원 제약공장의 설비를 빌려 주사약도 만들었다. 포도당원료를 끓여 증류수를 받아 주사약을 만들고, 개의 뇌를 증류가마에 달여 신경환자들을 치료하는 주사약을 만들었다. 제약이 힘들 때는 위생소의 4명이 전부 동원돼 밤 늦게까지 약을 만들곤 했다.

국장은 재배한 약재에 근거해 약방에서 부족한 약재를 사다가 처방을 내서 농민들의 감기를 치료하고 기침을 떼 주고, 여성들의 냉병을 치료하여 아기를 낳게 하고, 기운이 없는 사람들을 보신해주고, 기타 병들을 치료해주었다. 농민들의 집에 찾아가서까지 왕진하며 애를 쓴 보람에 이 위생소는 점점 더 소문이 나서 농민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줄을 섰다. 그 때마다 최진만 씨는 마음이 흐뭇했다고 한다.

70년대가 지나가고 ‘문화혁명’도 끝나고 등소평에 의해 개혁개방이 되자 ‘합작의료’는 종료되었다. 그 때로부터 최진만 씨는 농사하는 한편 약초를 캐서 팔았다. 한 사람의 인생에는 인연이 수두룩이 나타난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연은 자기의 애호(愛好)가 맺어주는 것이다. 최진만 씨도 약초에 대한 사랑이 인연이 되어 1994년에 한국 동우당제약과 만나게 됐다.

“조선시대 효종 때부터 6·25 이전까지 대구지방에서 봄·가을에 개시되었던 한약재의 계절시장. 조선 후기에 이르러 관인(官人)들의 억상정책(抑商政策)에도 불구하고 전국 각처에 보급된 향시제도(鄕市制度)는 교환경제를 발달시켰고, 이는 교환을 전제로 한 각종 재화생산을 전문화시켜 직업의 분화를 촉진시켰다. 이는 1609년(광해군 1)부터 실시된 대동법에 의해서 더욱 촉진되었고, 대구약령시는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배경으로 발생하였다. 대구는 경상좌·우도의 감영소재지로서 교통이 편리하고 한약재의 명산지가 인접해 있어 약령시의 발흥에 좋은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더구나 대동법의 실시에 따라 종래 상공(常貢)이나 별공(別貢)으로 관아에 수납했던 공물도 일단 판매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한약재는 용도에 관계 없이 원칙적으로 시장을 통해서만 조달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여건에 의해 대구약령시는 오랫동안 큰 시장으로 번창하였다. 처음에는 경상감영 서편 객사 주변에서 전개되었는데, 약재 생산자와 상인들은 정해진 개시일 동안 관인의 지휘와 통제를 받고 객주(客主)·여각(旅閣)·거간(居間)의 중개 알선을 받으면서 상품을 매매하였다. 그 뒤 도시와 약령시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1907년 남문 밖 오늘날의 약전골목으로 이전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생산자·상인들의 활동 제약과 14년의 <조선시장규칙>에 의한 규제로 크게 위축되었고, 이에 따라 23년에는 약령시진흥동맹회(藥令市振興同盟會)가 조직되어 부흥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653년(효종 9) 경상감영 내 객사 주변에 개장되어 역사가 가장 오래된 약령시(한국기네스위원회 인증)이다. 1978년 10월 제1회 개장행사 개최 후 85년 약령시 상설전시관 개관, 88년 보건사회부 전통한약시장 지역 승인, 2000년 7월 문화관광축제 지정, 2001년 문화관광부 문화의 거리 지정, 2002년 5월 제25회 약령시를 개최하였다.”

이상은 ‘야후 백과사전’ 에 기록된 대구약령시의 내용이다.
서술한바와 같이 약령시는 350년의 역사를 이어온 전통의 한방약재 거리로 인정받고 있으며, 동양의 진수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약전골목 일대로 한약방, 한의원, 약업사, 인삼사, 제탕원, 제환소 등 350여 한방관련업소가 밀집해 있다.
저렴한 가격에 침, 뜸 등의 치료를 받을 수 있으며, 인삼을 비롯한 한방 재료를 저렴하게 구입할 수도 있다. 또한, 한약재도매시장과 함께 위치한 약령시전시관에는 각종 한약재가 망라되어 있고 한의서, 한방기구 등 한방관련 용품도 전시되고 있다.

약령동/서문

대구약령시 서편 입구에 전통 골기와 지붕형 일주문인 약령서문(藥令西門)은 고고한 자태로 대구약령시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물로서 지붕과 기둥 등에는 약재로 사용되는 동ㆍ식물과 환약재조 및 치병기도 장면들이 형상화 되어 있다.

그러나 동편 상징문 건립 사업은 인근 상가 주민들간의 찬반 갈등으로 공사 시작 1년이 넘도록 공사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면서 도심 미관을 해치는 흉물로 전락하고 있어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2002년 말부터 시작된 상징문 공사는 건립을 요구하는 약령시보존위원회측과 사유재산권 침해를 이유로 반대하는 인근 상인들의 반발로 진통을 겪고 있으며 법원은 지난해 4월 공사중지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같은해 9월 이를 다시 받아들인뒤 지금까지 공사는 중단되고 있다.


사단법인 약령시보존위원회

약령시 전승문화의 발굴과 보존 및 계승사업을 보다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1978년부터 발족하여 933년 문화법인으로 인가를 받은 약령시보존위원회는 대구약령시축제를 개최하고 (주)한약재도매시장과 한약재상설전시장, 대구약령시전시관 등을 차례로 설립하는 등 여러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옴으로써 약령시 전승문화유산 보존과 활성화를 위한 구심체가 되어 왔다.

대구약령전시관 및 약초소공원

대구약령시의 350년 역사와 전통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는 대구약령시 전시관에는 1,000여점의 각종 한방유물과 자료들이 도입부와 재현부, 서적부, 약재부, 기구부, 박제실, 민속의료, 생약초실, 약초사진전시실 등으로 전시되어 있다. (개관 – 평일:9시~18시, 동절기 17시ㆍ공휴일,일요일:10시~17시)
뿐만아니라 전시관 주변에 지압보도와 건강 휴게시설을 설치하여 조성한 한방테마형 소규모 약령쉼터에는 애기똥풀, 박하, 관중, 국화, 식방풍, 우슬, 맥문동, 작약, 백합, 황기, 앵두 등등의 살아있는 약재를 볼수 있는 약초동산과 연계되어 있어 전시물과 생약을 함께 볼 수 있는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주)한약재도매시장

 대구약령시전시관 1층에 위치한 도매시장은 영천의 장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예전의 대구약령시를 전통 5일장과 경매를 통해 현대적인 개념으로 부활시킨 전국 유일의 한약재공판장으로서, 영천장날보다 하루 앞선 1일, 6일로 월 6회에 걸쳐 정기적으로 개시되며, 여기서 형성된 도매가격은 전국의 한약재 시세를 주도하는 공신력을 가지고 있다.
새벽부터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약재를 전시하고, 오랜만에 만난 이들과 따듯한 차한잔을 나눈다. 본격적인 경매는 11시부터 시작하는데 누구나 참석할 수 있으나 구매는 자격을 지닌 상인들만 할 수 있다.
경매를 하는 도중에도 서로 사담을 나누고 약초꾼들만의 우스게 소리도 오가며 매우 정겹게 진행되었다.

  

돌아오는 5월1일(토)~5일(수)까지 개장347주년 ‘2004 대구약령시한방문화축제’가 열린다.
‘2004대구ㆍ경북국제한의약박람회’도 4월 29일~5월2일 4일간 대구 전시컨벤션센터 EXCO에서 열리므로 주말을 이용해 가족들과 함께 관람하면 좋은 경험이 될 듯하다.

시골의 재래시장에는 볼거리가 많다.
영천의 장은 더욱 그러한 것이 재래시장과 약재시장이 함께 어우러져 장이 열리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곳곳에서 팔거리를 짊어지고 장으로 모여든다.
사람들이 저렇듯 많이 모여 사는지, 장날이 되면 도시를 이룬다.

재래시장과 약재시장은 도로하나를 사이에 두고 연결되어 있다.
약재골목 앞에서는 조금씩 모아온 약재를 정성스레 정리해놓고 주인을 기다린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수집해온 약재들은 대부분 야생이라 귀한 것이 많으나 요즘은 양도 많이 줄어들었다고들 한다.
농한기가 되면 산에 올라가 약초를 캐곤 했는데, 그 수가 점점 줄어드니 당연히 양도 줄어든다.
재배와 야생은 약성의 차이가 크니 값이 비싸더라도 중병을 다스리는 한의사들과 민간인에게 잘 팔린다.
유근피와 가시오가피만을 가지고 나온이도 있다. 돈을 벌려는 것이 아니라 소일거리로 나오신 모양이다. 지구자, 상황버섯, 구기자, 오미자, 상백피, 황기, 더덕, 인삼, 마, 위령선, 골담초, 유근피, 잔대, 자초……
민간약재로 쓰이는 약재가 많이 나온다.

자초도 그 중에 하나인데 뿌리약이라 줄기가 말라 버린 겨울부터 싹 트기 전 초봄까지가 약성이 최고조에 달한다.
자초는 어린아이 팔둑굵기만 되어도 산삼처럼 대접을 받는다.
그도 그런 것이 10년이 되면 어른 엄지손가락 굵기 정도가 되고 2~30년이 되어야 어린아이 팔둑정도 된다.
건재보다 생물로 더 많이 유통이 되므로 살 사람을 먼저 정하고 약초를 캐는 경우가 많다.
방금전에 한 뿌리를 30만원에 팔았다고 제법 굵은 놈을 가지고 온 아저씨의 입담이 거세진다.

산도라지도 이렇게 굵은 야생은 보기 힘들다며 뇌두를 가리키며 재배는 뇌두가 없다고 한다.


가을에 건조된 조협도, 싹이난 맥아도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옴니허브에서 겨울갈근을 판매한지 몇 해 지나 너도나도 겨울칡이라 판매할 때도 그랬지만 맥아도 싹이난 맥아가 시장에 유통되기 시작한걸 보니 가슴한켠이 뭉클해진다.

재래시장엔 사람이 많고 약재골목엔 약재를 실어갈 차들이 늘어서 있다.
영천에서 몇해전 한약재 육성방안을 위해 ‘도동유통단지’를 만들어 많은 도매상들이 옮겨 갔지만 아직 정착되지 않고 두 곳에서 동시에 거래가 이루어진다.
도동유통단지는 관광차들이 들리기도 한만큼 시에서 육성하고 있다.


옴니허브에서는 작업하는 약재를 제외하고 수집하는 약재나 선별 약재는 할머니들이 소량씩 모아온 약재를 장날마다 조금씩 모아 작업을 하고 대량으로 필요한 약재는 약재골목에서 선별하여 재작업을 한다.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중에 우울하거나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는 병원이나 시장에 가보라신다.
병원에가면 내 몸이 건강함에 감사를 느끼고 시장에 가게되면 사람사는 정이 느껴져서 일까?
매번 장이 열리지만 갈 때마다 새롭고 재미가 있다.
영천장은 2일과 7일에 열린다.
명소를 구경하는 것도 바다 바람을 쐬러 가는 것도 좋지만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 한번씩 들러도 좋을 듯 하다.

천마 꽃대가 하나 올라왔으니 구경하러 오라는 전화에  카메라부터 챙겨들고 나선길입니다.
그 보기 힘들다는 천마꽃이 피었다는데…

실물로는 한번도 본적이 없어,  무주 가는길 내내 혹시나 그새 꽃대가 쓰러지지는 않았는지, 며칠 사이에 꽃이 다 시들어버리진 않았는지 급한 생각이 듭니다.

천마 꽃대는 5월 하순에서 6월 초순사이 한때 잠시 올라왔다가 금세 사라져 버리기도 하거니와  꽃대가 올라오는 놈은 번식력을 가지는 것으로 사람으로 치자면 장성한 처녀 총각…
재배를 시작한지 2∼3년은 지난것인데  보통은 그전에 채취해버리므로,  재배를 하는 약재이지만, 꽃을 보기가 힘든 이유입니다.

중국에서 재배법이 들어오기전에는 천마재배는 생각지도 못했다면서

“이걸 안가르쳐줬으면 누가 알고 재배를 해…   하 참∼,  중국놈들 신기하단말이야..”

안내하시는 분은 천마를 재배하신지 몇 년이 지나신 지금까지도 재배법이 희한하신지  연신 감탄사를 늘어놓으십니다.

천마는 뿌리로도 영양분을 흡수하지 못하고, 태양빛을 듬뿍 받아야할 잎도 없는 기생식물입니다.
해서, 영양을 공급해줄 모체가 있어야하는법…
배수가 잘되는 마사토에  30cm정도 길이의 참나무 둥치를 세우고  구멍을 통해 종균을 넣고  종마를  달아준다음 흙을 덮습니다.

습도를 유지하고 그늘진 곳을 만들어주기위해
흙위에는 짚을 깔고  무성한 잎이 자라는 다른 식물들을 심어주기도 합니다. 아래로 자라는 데다 이렇게 위장술까지 쳐놓은 천마밭은  주인이 아니면 누구도 알아보기 힘들겠지요. 천마 재배가 이렇게 보편화되기전,  천마밭 하나면 소한마리 끌고 나온다는 말이있었을만큼 한창 천마가격이 높았을때에는  야생 천마군락이라도 발견하면  다음번에 찾을 수 있는 표시를 따로 해놓아야할 만큼  꽁꽁 숨겨진채 자라는 식물이 또한 바로 이 천마입니다.

바람이 불때는 가만히 있다가  바람이 멈추면 홀로 흔들린다는  천마….
去風止痙 하는 효능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흔들리는 바람에도 꼿꼿이 서있는 천마를 보면서 생각해봅니다.

4월 중순의 강원도 정선 일대는 한해 농사 준비로 정말 새참 드실 짬도 없어 보였습니다.

이번에 저희는 강활, 일당귀, 토당귀, 일천궁, 토천궁 등의 새싹 올라오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갔었지만 워낙 바쁘게 일하시는 농민들 모습에 자칫 카메라 들고 찍는 것조차 누가 될까 무척이나 조심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앙증맞게 솟아나는 여러 가지 약초들의 모습을 보고 느끼고, 다가올 여름에 더욱 무성해질 모습을 상상하면서 기분 좋은 며칠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갓올라온 강활의 새싹입니다. 뿌리부분을 함께 보세요


강활은 중국과 기원 식물이 다르다고 합니다. 아무려나 이곳에서 재배중인 강활(남강활이라고 함)은 강원도 깊은 산속에서 채취한 자연산 모종을 하나씩 하나씩 모아 옮겨 심었다고 합니다. 노력과 땀이 많이 배어있겠지요.

일천궁

토천궁입니다.

천궁의 기원식물을 고증하면 토천궁이 보다 가깝습니다만 약초재배 농가들은 점점 토천궁을 외면하고 일천궁을 선호한다고 합니다. 재배가 용이하고 수익이 높기 때문이라고 합니다만 저희가 토천궁을 찾아 사용하고자 한다면 분명 토천궁이 널리 재배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당귀입니다.


토당귀의 모습입니다.
사진에서처럼 일당귀와 토당귀는 그 모습과 느낌(感)이 같지 않습니다. 그 약성도 물론 갖지 않겠지요. 이를 구별해서 사용하는 한약재의 범위의 확대가 하루 빨리 정착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고본입니다.
삐죽삐죽한 잎의 모양이 또 뿌리에서 맡을 수 있는 향내가 그 약성을 짐작케 합니다.


백지입니다.
잎이 일당귀 비슷하지요. 뿌리를 씹어보면 얼마나 매운지.. 혀가 얼얼합니다

사실 일천궁이네 일당귀네 뭐 일시호네 일황련이네.. 하는, 또 천황련이네 토대황이네 회우슬이네.. 하는 갖가지 수식어들이 붙는 약재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약재를 대할 때마다 두 가지 생각이 함께 드는데 약재의 범위가 자꾸 넓어지는구나.. 각기 다른 장점과 약성을 갖는 약재가 다양해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라는 생각과 더불어 한편으로는 그 다종 다양한 약성을 잘 구별해서 사용해야 할 텐데..하는 어쩌면 섣부르고 건방진 염려가 듭니다. 하나씩 하나씩 정립되어 나아 가야할 부분이겠지요.

독활과 방풍(식방풍)은 또 어떤 모습일까요.. 물론 봄의 모습입니다만.

독활과 방풍.. 역시 말이 좀 있는 약재입니다만 봄에 솟은 이 모습은 정말 보기 좋고.. 반갑고..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어린 생명만큼 보기 좋은 것이 있을까 싶습니다. 특히 그 성질이 모난 면이 있다는 약초는 더 그런 느낌이 듭니다.

두충나무 심는 것이 유행처럼 시골에 번졌던 일이 있습니다.
한 10-20여 년 전쯤에 말입니다. 그때는 두충나무가 돈이 된다는 소문에 너도나도 노는 땅에 두충을 심곤 했습니다. 하지만 약재 성격상 10년 이상 키워야 상품성을 갖게 되고 생각처럼 경제성이 없어서 요즘엔 꾸어다 노은 보릿자루와 같은 취급을 받는 경향이 있는 실정이지요. 심지어 돈을 안 받고도 저 나무들 좀 베어가라는 사람들까지 있는 편입니다.

이번 여정에 17-18년 된 두충나무 밭을 작업하는 곳이 있다고 해서 들러 보았습니다.

생육 환경이 비교적 좋은 곳이라 두충나무들이 키도 큰 편이고 코르크층이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로 얇았습니다. 전기톱으로 밑둥을 베어 큰 둥치는 아저씨가 작은 가지는 아주머니가 숟가락과 밥주걱을 이용해서 훌떡 벗겨냅니다. 깨끗한 속살이 보기 좋으면서도 그렇게 또 미안할 수 없네요.
당연히 요즘처럼 봄철에 나무에 물이 올라 있을 때에라야 수피가 목질부와 쉽게 분리됩니다. 모든 수피류 약재가 다 그렇지요. 잘리운 나무의 단면에서 나이테를 볼 수 있습니다. 기구를 이용해 코르크층을 제거하는 모습도 있네요.

한의사들은 항상 푸른 숲과 들판 속에서 살아갑니다.
약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다시 한번 약장을 봅시다.
약장서랍 속은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향기로운 풀내음이 가득한 자연 그 자체입니다.


2001년4월28일, 약장서랍 속 약재들의 자생지를 둘러보기 위해 우리나라에서 暖帶로는 위도가 가장  높다는 안면도를 찾았습니다. 안면도에서도 꽃지해수욕장, 그 주변 해안가 낮은 산들을 뒤졌습니다.

산 속을 뒤지다가 어느덧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안면도의 남단 영목항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그리고 찾은 민박집은 복음 민박. (이름과 달리 福音은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4월 29일, 다음날 아침 민박집 이층에서 내려다 본 마을 풍경은 평화스럽기만 합니다. 멀리 바다가 보입니다.

잊지 못할 조개탕과 영목항 전경- 영목항 바닷가 끝까지 내려오면 현해탄이라는 횟집이 있습니다.
이 집의 조개탕은 평범한 바지락으로 끓이지만 아침 해장으로 먹은 그 맛은 최고였습니다.
(한그릇 5,000 원)

아침식사를 마치고 사구(砂丘 dune)에 자생하는 약초를 보기 위해 ‘바람아래’라는 멋진 지명을 가진 곳으로 향했습니다. 해변에 핀 통보리사초 군락 속에서 한 컷 찰칵 – 경희대 한의대 예과2학년 천남성동호회(?) 여러분과 정재민 식물분류학 박사님 입니다.

사구에서는 별 소득이 없어 다시 백리포해수욕장의 야산을 타기로 했습니다.
산에서 내려다본 바다

그리고 下山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월 31일 영천 보현산 자락
영천의 보현산은 예로부터 채약산이라 불리울 정도로 약초가 풍부한 산입니다.
잡목과 소나무가 적절히 자라면서 약초가 살 수 있는 틈을 내어줄 수 있는 산이기 때문이죠.
예로부터 보현산 자락은 영천이라는 큰 약재시장을 끼고 있어 약초를 많이 재배한답니다.
예를 들면 시호, 천궁, 백지, 삼백초, 어성초, 백작약, 황금, 토대황 …… 인데 다른 지역에 비해 종도 다양한 편입니다. 자, 시원하게 지프차로 보현산 자락을 한번 둘러보실까요.

백지를 심고 있는 광경이군요,
풀 때문에 비닐을 깐 다음 구멍을 뚫고 거기에 씨앗을 2-3개 살짝 묻으면 한달 쯤 지나 싹이 나온답니다.

비포장으로 들어가니 대구와 포항간의 고속도로를 뚫는 암반 터널공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길가로 살구나무와 산수유나무에 꽃이 활짝 피어 있습니다.
그러나 올해는 개화기에 내린 서리와 한파의 영향으로 꿀벌이 꽃을 찾지 못했답니다.
개화기에 꿀벌이 활동을 못한다면 수분이 되지 않아 열매의 작황이 떨어진다니 올해는 산수유가 아마 흉작이 되겠지요.

자 이제 약초가 심어진 농가에서 기지개를 켜고 올라오는 약초의 힘을 느껴보세요.

작약입니다.

목단입니다. 붉은 싹이 바로 꽃으로 펼쳐지는 특이한 형상이죠.

토대황입니다. 옆 사진은 건조중인 뿌리입니다.

익모초와 토천궁입니다.

백지와 감국입니다.

골담초의 싹이 돋고 독활의 촉이 땅을 뚫고 있습니다.

재래종 백하수오입니다.
오늘의 수확은 경제논리에 의해 사라져 가는 재래종 백하수오의 씨앗을 찾아낸 것이라 할까요?

산길을 넘어 돌아오는 길에 인동등이 나무를 감고 있군요.
멀리 보현산 천문대가 우리를 배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