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콸콸 쏟아지는 길을 따라 걸었다. 산 밑에 이르러보니 산골짜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작은 강을 이루며 흐르고 있었다. 북쪽을 향해 물 속을 행진하며 한참을 내려가다가 동쪽으로 굽어든다. 왼편도 높은 산이고, 오른편도 높은 산이다. 다행히 목적지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한참을 가니 외딴 오두막집이 나타난다. 그 쪽을 향해 작은 외나무다리 두 개를 건넜다. 참나무들이 뗏목 같이 나란히 누워있고 그 우에 검정버섯이 꽉 재배돼 있었다. 다시 앞을 보니 너비가 수 미터는 될만한 작은 강이 흐르는데 소용돌이가 있는걸 보면 물이 꽤 깊어 보인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는데 다리가 떨렸다.

작은 강을 건너고 보니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오두막집의 전경이 보인다.
앞에 작은 연못이 있고 놀랍게도 아름다운 연꽃이 가득 피어있다. 뒤쪽은 뽀얀 운무요, 남쪽은 가파롭게 생긴 대릉장산(大楞場山), 그 곳 전체가 삼이라고 한다. 외딴 오두막, 연못, 운무, 삼산. 그야말로 민담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고 스토리다.

《용드레우물》의 기록에 의하면 중국 동북지구에서 연꽃을 재배한 역사는 발해 때부터 이다. 발해의 수도였던 화룡현 서고성과 훈춘현 팔련성의 성터에서는 연꽃터가 발견됐고, 연꽃무늬막새와 ‘4존불’이 나왔는데, 4존불은 연꽃 속에 돋우어 새긴 것이었다. 발해의 건축물과 부처에는 거의 다 목단과 연꽃도안이 장식돼있다.

대릉장산이 속해있는 통화지구는 발해 제1 수도였던 오동성(돈화시)에 인접해있다. 연꽃을 보며 찬란했던 발해 역사를 떠올려본다. 발해의 연꽃이 천년을 피었다. 지금까지 쭉 피었다. 발해의 멸망과 함께 지어버린 벼꽃이 천년 후 우리 배달민족에 의해 중국의 광활한 동북 수천리 벌판에서 다시 피어난다. 이것 역시 숙명이 아닐까.

산은 가팔랐다. 누구 하나 불만이 없다.
산이 가파른 것이 삼으로 가는 길에는 썩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주인의 발자취를 알려주듯 골짜기에 작은 길이 나있고, 가파른 곳에는 발 하나를 올려놓을 수 있도록 흙층계가 만들어져 있다. 가시오가피, 위염에 쓰인다는 무슨 풀 등 약초들이 가득했다.

신 교수는 일일이 약초의 이름을 불렀다. 산중턱에 이르러보니 나무들이 가득한 수림 속에 입사귀가 새파란 삼이 가득 자란다. 오명주 씨는 이 곳이 순수하게 산의 기운에 의해 삼을 키운 삼산이며, 현재로는 중국에서 삼의 나이가 가장 많은 삼산중의 하나라고 소개한다.

기록에 의하면 중국은 삼을 재배한 역사가 서진 말년부터 1600년, 세계에서 인삼재배가 가장 이른 나라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동북삼성의 인삼이 가장 유명했으므로 명말 청초에는 해마다 가을이면 요령성 영구에 동북삼성의 인삼을 집중시켜 장을 보았다고 한다.

21여 년 전에 이 산에 산삼씨를 뿌리고 여태 이 산을 지킨 삼주인 리정전(李正田) 씨가 우리를 마중했다. 돈이 있어도 돈 티를 내지 않는 것이 한족이다. 한족은 아무리 옷차림이 허술한 노인이 죽어도 그가 벴던 베개 속에는 돈다발이 들어있다는 이야기가 조선족 중에는 어떤 탈무드처럼 전해져 있다. 한족들이 돈을 잘 모으는데 비하면 조선족은 돈을 잘 쓴다고 우리 신문에서는 많이 비판하곤 한다.

60대의 삼주인의 얼굴에는 삼이라는 것이 적혀있지 않았다. 배추밭을 둘러보러 온 손님이나 마중하듯이 범상한 표정으로 손님들을 맞이했다. 산사람답게 작업복차림을 하고 군살 없이 체소하고 건강해 보인다. 산 중턱에 큰 통나무집이 있고 그 안에 침상용구가 갖춰져 있다. 잘 생기고 위풍스러운 개가 짖어댔다. 역시 삼에 어울리게 체대도 크고 품위 있는 멎진 개였다.

20년 전이면 80년대 초반이다. 중국이 1978년 중국공산당 11기 3차 전원회의를 계기로 개혁개방을 하고, 그로부터 몇 년만에 산삼 씨를 이 산에 뿌렸다는 이야기다. 아직 계획경제와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중국에서 그 때 벌써 이 산을 도급맡았다는 것, 이 주인의 뛰어난 예단력과 생존력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산은 전체가 삼인데, 도합 백만 평방미터가 된다. 10가구에서 가구당 한쌍씩, 즉 만평방 미터씩 도맡았다.
이정전 씨는 부인, 딸, 아들과 함께 도합 7명 식솔이 이 산에서 살았다. 삼을 지키는 개들도 십여 마리가 있다. 사냥개종자들도 있고 보통 개들도 있는데 아주 영리하단다. 십여 곳에 개들의 초소가 있는데 각자 자기 직무에 충성한다고 한다.

삼이 잘 팔리고 경제수입도 많아지자 이 씨는 삼산을 자식들에게 맡기고 고향 산동으로 떠났다. 나이가 들었으니 낙엽귀근(落葉歸覲)이라고 집도 새집으로 갖추고 편안히 살다가 고향에 묻히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에 삼이 어른거려 마음이 붙지 않았다. 다시 짐을 꾸려 돌아오니 이제 그들의 고향은 산동이 아닌, 삼이 있는 이 곳이었다. 고향의 새집은 지금도 비어있다고 한다.
10가구가 산 속에서 21년을 삼을 살피며 지키며 살아왔다. 외롭지만은 않다. 와신상담 끝에는 성공이 있기 때문이다. 산 전체가 삼이다.

이들은 후세들까지도 살 수 있는 터전을 꾸렸다. 삼 한 뿌리면 도시 공무원의 한 달 월급 이상이다.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더 부자다. 하지만 그 동안의 고생은 말할 수 없다. 그러는 동안 10가구는 친척처럼 친하게 지낸다. 평소에도 서로 산을 보아주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함께 도우면서 사이좋게 살아오고 있다고 한다.

비는 여전히 끝없이 내렸다. 동우당제약회사와 의논한 끝에 주인은 삼 한 뿌리를 채집하기로 했다. 허담 원장과 신 교수, 정 교수가 그 과정을 섬세하게 녹화했다.

주인은 가위, 삽, 붉은색 천을 맨 루구챌(鹿骨簽, 사슴뼈로 만든 길다란 저가락 모양의 납작한 꼬챙이)을 가지고 삼 하나를 골라 캐기 시작했다. 먼저는 삽을 주변에 깊게 박아 살짝 들고 흙을 살살 털어 낸다. 루구챌로 뿌리가 드러난 쪽의 흙을 살살 파헤쳤다. 불필요한 나무 뿌리들은 가위로 잘랐다. 삼 뿌리는 21년을 그러했듯이 땅속에 사지를 뻗고 혼곤히 잠들어있다. 루구챌로 그 겨드랑이의 흙들을 간지르듯이 하나하나 파헤쳤다. 한 뿌리를 캐는데 40분 가량 걸렸다.

주인은 사슴뼈로 만든 도구를 쓰면 삼을 파헤치는 과정에 삼이 상하지 않고 썩지 않는다고 한다. 루구챌의 붉은 댕기를 보며 장백산 인삼에 관한 만족들의 전설을 떠올린다.

목단강 상류에 허씨라는 지주가 도사를 청해 자기의 산에 보삼(寶蔘)이 있는지 없는지 봐달라고 부탁한다.
도사는 향안(香案)에 맑은 물 한 그릇을 떠놓고 허리춤에서 ‘퉈리’(만족어로 神力이 있는 거울을 말함)를 꺼내 비춰보더니 보삼 앞에 왜 닭이 어른거릴까 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주인은 식구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닭띠는 하나도 없다. 이번엔 일꾼들을 살펴보았다. 그중 말몰이꾼 치무가 닭띠이다. 주인은 치무를 데리고 ‘방산’을 간다.

어느 날 치무는 아름다운 인삼을 만나게 된다. 인삼에 담배쌈지를 맸던 붉은 끈을 둘러놓는다. 금방까지도 청초하던 인삼이 기운을 잃고 머리를 떨어뜨린다. 인삼도 자기 죽을 날을 아는구나 라고 생각하니 불쌍해서 붉은 끈을 거두어 들였다. 그러자 인삼은 금방 정신을 차리며 씩씩해진다.
그 후부터 치무가 힘든 일에 부딪칠 때마다 붉은 망울꽃을 머리에 인 오허다라는 처녀가 나타나 도와준다. 치무는 주인집을 떠나 오허다와 결혼한다. 오허다는 아들 여덟을 낳는다. 주인은 뒤늦게 오허다가 인삼처녀라는 것을 알고 그들이 사는 집에 붉은 끈을 두른다. 치무와 오허다는 말을 탔지만 그 붉은 끈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여러 곡절을 겪고 나서 치무와 오허다는 인삼자식들을 거느리고 장백산으로 도망한다. 그래서 지금 장백산에는 치무와 오허다가 낳은 인삼자식이 끝없이 많다고 한다.

인삼은 땅의 정기를 받았기에 토정, 지정이라는 이름도 갖고 있다. 중국의 《광오행기》의 기록에 의하면, 수나라 때에 한 사람이 밤이면 창문 밖에서 부름소리를 듣곤 했다. 이상해서 나가 보았더니 이상한 풀이 자라있었다.
그것을 뽑았더니 모습이 사람을 닮아 머리가 있고 목이 있고 사지가 있는 아름다운 인삼이 나왔다. 그것을 정히 집에 보관했다. 그 날부터 더는 부름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삼이 땅의 정기를 받았다는 것을 한층 증명하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인삼이 머리와 팔과 다리를 하나하나 드러내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드디어 인삼이 완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형태는 사람 같고, 공력은 천지(天地) 같다.”라는 말 그대로 모습이 그야말로 사람을 똑 닮았다. 삼형(蔘形)도 잘 나와서 20여년을 땅속에서 지낸 보람이 있었다. 자연이 어쩌면 인간에게 이처럼 큰 선물을 내릴 수가 있을까, 생각할수록 자연이 감사하다.

돌아올 때에는 대릉장산의 길이 빗물에 씻겨내려 산을 내리기 힘들었다. 나는 두 번이나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산을 내리고 외나무다리를 지나서 도로에 들어섰다. 그동안 길은 더 엉망이 되었다. 말이 길이지 강물이나 다름이 없다. 그런 와중에도 오랜만에 빗물에 발을 적신 아흥(雅興)이 남아있어, 억수로 쏟아지는 비 줄기를 맞으면서 험상궂은 고목과 산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겼다.

기사가 예견했던 대로 길은 험하게 밀려있었다. 정말로 돌아가지 못하고 어느 시골집에 머물러있으면 어쩌나 근심이 앞섰다. 너무 험하게 밀린 길이 앞에 있을 때면 오명주 씨가 먼저 물 속에 뛰어들어 차를 지휘했다. 말이 씨가 된다고 누구 하나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차가 뒤집힐까봐 걱정이다.

길은 다섯 곳이나 물에 밀려 작은 강을 이루었다. 기사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일행은 “화이팅!”을 외치며 기사를 응원했다. 한군데를 순조롭게 지날 때마다 기사에게 박수를 보냈다. 기사의 기술이 높은 덕에 무사히 안전지대에 이르렀다.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배고프다는 소리들이 나왔다. 시간은 오후 네시였다. 비는 무엇이 사무친지 여전히 하염없이 내렸다. 누군가 오늘의 곡절이 장수하늘소를 노엽힌 탓이라고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천의요! 인간이 하늘이 내린 신초를 보러 온 것인데 하늘이 쉽게 길을 열어주겠어요?” 라고 신 교수가 대답해 모두들 금방 그 말에 동의했다.

과장적인 비유가 되겠지만, 당승이 손오공 등과 함께 서행하여 경을 가지러 갈 때에도 요귀와 싸우며 온갖 곡절을 겪었던 것을 보면, “천초지령, 백약지장”의 인삼을 만나는 길이 순조롭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듯 하다.
배낭 속에 있는 장수하늘소가 들었으면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생각은 세상을 바꾼다. 세상이 바꿔지지 않더라도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꾼다. 그 동안의 고생을 삼의 신기(神氣) 탓으로 달갑게 받아들이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져서 모두들 끄덕끄덕 졸기 시작했다. 늦은 점심을 먹은 탓도 있을 것이다.

안도의 한 시골에서 서양삼장을 돌아보고 다시 연길 방향으로 달렸다.

밖은 여전히 비가 사무치게 내리고 차안은 점점 어두워왔다. 창밖 풍경은 차를 스쳐 끝없이 뒤로 물러나는데 차안은 정적이 깃들었다. 옷이 젖은데다가 몸이 피곤해서 모두의 머리가 의자 등받이 위에서 흔들흔들 춤을 추었다.
나는 조금 졸고 나니 정신이 맑아져서 물끄러미 창 밖을 바라보았다. 뽀얗게 밤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다. 창 밖이 차안보다 밝아 무성의 흑백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듯 하다. 창문에 서린 김을 닦아냈다. 비가 내리고 밤이 내린다. 몽롱한 기운 속으로 산들의 선이 기복을 이루며 흘러 지났다. 그 풍경이 어떤 언어인 듯 음악인 듯싶어 나는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다. 의자 등받이 위에서 춤을 추는 일행들의 머리도 하나 하나의 음부(音符)인 듯 한데…

춘하추동이 어떻게 바뀌는지 모른 채 글 쓰기에 시간을 죽인지도 꽤 오래됐다. 정말 오랜만에 산행을 했다. 오랜만에 이렇게 평온한 심정으로 경물을 바라보고 감상하고 음미하고 있다. 일상에 마음도 몸도 많이 지칠 때면 배낭 하나를 달랑 메고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멀리멀리 여행하며 기행일기나 적고 싶다고, 그런 생각을 수없이 간절히, 때로는 이를 갈며 정말로 많이 했었다. 그런 행복이 지척에 있는 줄은 몰랐다. 아무 때라도 이렇게 산골 버스에 앉아, 단기 여행일지라도 낯모를 사람들의 틈에서 제멋대로 생각을 하거나 졸면서, 공기처럼 바람처럼 자유롭게 떠돌아 다닐 수가 있는 것을…

행복은 지척에 있었다. 자연은 내 속에 있었다. 마음을 열기만 하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자연이… 숨을 죽이고 어둠 속을 바라보며 자연의 음악을, 약초의 숨결을 듣는다.

백금령의 산들이 국화(註 : 國畵=중국에서 서양화 또는 書畵에 대하여 筆墨으로 그린 전통적인 회화를 이르는 말)에 나오는 산수화처럼 기세 있게 솟아있다. 바위가 날카로워 강이 수려해 보이고 강이 수려해 산이 더 의젓해 보인다. 멀지 않은 곳에 강물과 강바람에 여러 가지 곡선을 만들며 휘어진 낮은 버드나무들이 분재같이 아름답게 서있고, 아담한 농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곳은 특별히 까치가 많은 곳이다. 까치가 우짖는 소리에 상쾌한 아침이 깨곤 한다. 지금도 귓가에 까치소리가 다정하다.

1990년 음력설을 이곳에서 쇤 적이 있다. 내가 소속해있는 작가협회 전업작가들이 이 곳에 생활체험을 내려와서 농민들과 함께 대보름까지 쇘었다. 그 때 이 곳 농민들은 찰떡을 치고 두부를 앗고(註: 앗다=두부나 묵을 만든다는 북한어) 술을 사서 북한에 보냈다. 나는 문우와 함께 미끄럼을 치며 북한쪽으로 다가갔다. 강으로 나온 북한 사람들과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광복이 날 때까지만 해도 조선족은 국경이 막힐 줄은 몰랐다. 언제든 고향에 간다는 마음으로 두만강 가에 터전을 잡고 살았다. 광복에 고향으로 가지 못한 사람들은 대개 네 가지 부류, 부모 삼년제가 끝나지 않아 산소를 두고 떠날 수 없는 사람, 일본군에 강제로 징병된 자식이 돌아오지 않아 기다리는 사람, 여비가 없는 사람, 가도 발을 들여놓을 집 한 채, 땅 한치 없는 사람들이다. 두만강가에 있는 정암촌에는 고향에서 잊혀진지 오래된 ‘청주아리랑’ 망향의 노래를 부르며 60여년을 살아온 충북마을이 있다. 그렇게 강 하나를 사이 두고 어느 날 두 나라 국민이 되었다.

광복을 계기로 조선족은 3차례 대 이동을 겪는다.

첫 번째는 광복, 120만 명이 귀국하고 90만이 남아 현재 200만이 되었다.
두 번째는 ‘문화혁명’시기 민족동화정책의 탄압을 피해 수만 명이 고국으로 이동, 한국으로 가는 길은 막혀있고 주로 북한으로 이동했는데, 그 때 이 두만강에 밀항하는 사람들의 시체가 많이 떴다고 한다.
세 번째는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의 실시에 힘입은 조선족의 한국 친척방문 및 노무종사, 유학이다. 현재 한국에 16만이 체류 중, 그중 상당한 사람은 불법체류자라고 한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조선족이 북한으로 식량과 옷, 돈을 지원하고 있고, 북한의 중국친척 방문 행열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언젠가는 이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한반도가 하나로 될 때가 있으리라.

한동안 굳었던 분위기는 신민교 교수(원광대)가 잠자리를 촬영하면서 자연스레 풀어졌다.
이 때 우리는 백금의 수력발전소 난간에 기대여 국화(國畵)같이 선이 거칠고 기세가 좋은 백금령과 북한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까운 산은 녹빛인데 멀리에 있는 산은 남빛이다. 산의 색깔이 다른 까닭은 그리움 때문이 아닐까. 나는 시인이 아니면서도 주제넘게 시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때 신 교수는 숨을 죽이며 렌즈를 버드나무에 대고 있었다.
두만강가 버드나무에 잠자리 여섯 마리가 앉았다. 나래가 검은 레이스 모양으로 된 흔치 않은 호랑이 잠자리 한 마리, 수탉 볏같이 빨간 고추잠자리도 두 마리 있다. 잠자리들은 쉴새없이 날아다니는 곤충인데 이때는 중요한 회의나 하듯이 오순도순 모여 있다.

“너 이놈들 진짜 스타가 됐어. 뜬 거야! 내 카메라에 잡히면 다 스타가 되는 거여! 감사해야지. 그래, 꼼짝 말고 있어.” 신 교수가 잠자리들에게 진지하게 말해 모두들 웃었다. 신 교수는 자연과 교감하는 방식이 자연스럽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렇게 자연스럽지 못할 것 같다.

최진만 노인이 하수오의 유래를 말했다.

한 사람이 50세까지 자식을 보지 못하다가 하수오를 먹고 장가가서 자식을 보고, 자식의 이름을 수오라고 했으며, 160살까지 살았다는 것이다. 답사팀이 나란히 서서 기념촬영을 하는데 동우당제약회사 중국 약재 수구(收構) 담당인 조선족 박현철 경리(사장)가 토사자를 발견했다. 연녹색의 줄기가 풀과 나무들의 사이를 교묘하게 얽은 넝쿨 나물이다. 가을에 좁쌀 같은 열매가 달리는데 그것으로 죽을 쑤어 먹었더니 고소하고 맛있더라고 했다. 누군가 토사자도 그냥 먹으면 아들 20명을 낳고, 죽을 해먹으면 아들 40명은 낳는다고 농담해서 20대인 박 경리의 얼굴이 붉어진다. 토사자는 곁에 있는 식물들에 칭칭 감겨 영양을 빨아먹고 기생하는 약초인데, 성질은 야비하고 고약하지만 남자들에게는 좋은 강장제란다.

차창 밖으로 바람이 날아들긴 하지만 날씨는 무덥기 그지없다. 졸릴 때마다 산머루를 한알씩 따 먹었다. 너무 시어서 정신이 번쩍 났다. 머루줄기는 세 번 뻗었는데, 번마다 나뭇가지를 꼭 세 번씩 감았다. 자연이니 말 그래도 자유자재의 의지로 살아가는 줄로 생각했는데, 줄기가 이처럼 정확하게 세 번씩 감긴 것을 보고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신 교수는 내가 내민 머루줄기를 찬찬히 보더니 “3은 행운의 수자요, 삼삼수는 행운의 나무요. 자, 행운 축하합시다!” 라고 해서 모두들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이튿날의 코스는 백두산에서 멀지 않은 백산시 인삼답사이다.

행운의 나무와 만났으니 산신령이 보내주는 만병지령약(萬病之靈藥) 산삼을 만나는 일이 형통하다는 뜻이리라.

신 교수의 자연과의 교감방식을 살펴보며 생각했다. 자연은 달이 뜨고 지고 해가 뜨고 지고, 꽃이 피고 지고, 춘하추동이 변화하는 것만이 아니다. 자연은 창밖에 있고 우리는 집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가면 만나고 집에 있으면 만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자연은 우리 속에 있는 것이다. 자연과의 대화는 마음이 해야 한다. 마음이 문을 닫으면 인간은 병이 든다. 자연은 우리 속에 있었다.

늦은 점심에 용정에 도착했다.

용드레 우물에서 멀지 않은 조선족 집에서 냉면을 맛있게 먹고 3시에 출발했다. 세 시간 반 가량 달려서야 안도현 이도백하에 도착했다. 해가 넘어가 서쪽 하늘이 어두운 보랏빛에 물들어있다.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호텔에 짐을 풀고 나니 저녁 7시이다. 식사는 7시 반에 했다.

이도백하는 백두산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연길에서 이틀 관광을 잡은 사람들은 거의 이도백하에서 머문다. 다음 목적지는 백산시 연강향 대릉장 인삼산, 이도백하에서 차로 2시간 반 가량 걸린다고 한다.

중국 사람들은 산삼을 ‘방추’라 하고 산삼을 캐러 가는 것을 ‘방산’(放山), 즉 산으로 간다고 한다.
청나라가 봉금 정책을 실시했을 때에 백성들이 산삼을 캐는 것을 엄금했기 때문에 ‘삼’이라는 말은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인삼을 캐는 사람들은 모두 나무막대기를 가지고 다녔으므로 삼을 캐는 것을 방추를 캔다고 했고, 산에 가서 캐야 하므로 ‘방산’이라고 했다.

한족 심마니들은 삼을 캐러 갈 때면 꼭 두 가지를 지킨다.

첫째는 절대로 타다 만 나무에 앉지 않고, 둘째는 뱀이나 두꺼비를 보아도 절대로 그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뱀을 보면 ‘돈다발’이라 하고 두꺼비는 ‘원보’(元寶)라고 한다. 그럴만한 이야기가 있었다.

옛날에 과부 슬하에서 자라는 한 남자애가 있었다. 방추를 캐서 자기를 위해 고생하는 엄마에게 밥을 배불리 먹게 하고 싶었다. 어리다고 동네사람들이 데리고 가주지 않아서 혼자 산을 헤매며 삼을 찾아 다녔다. 지칠대로 지쳐 타다만 나무에 누워 잠이 들었는데, 수염이 하얀 노인이 나타나서 인삼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다. 노인은 “타다 만 나무는 하느님이 나에게 준 베개이니 다시는 앉지 말라”면서 나무를 들고 가버렸다. 그 바람에 나무에서 굴러 떨어진 아이는 잠에서 깼다. 노인이 가르쳐 준 곳을 보니 멀지 않은 곳에 인삼 두 그루가 있었다. 아이가 인삼을 캐 가지고 산을 내려오자 음식점에서 밥을 먹던 손님이 원보 두 개와 돈 한 다발로 그의 인삼을 사갔다. 아이가 원보와 돈다발을 멜광주리에 메고 집으로 가는데 갑자기 강도가 나타나 광주리를 빼앗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광주리안에 원보나 돈다발은 없고 뱀 한 마리와 두꺼비 두 마리만이 있는 것이다. 화가 난 강도는 뱀과 두꺼비를 아이의 목에 단단히 묶어놓고 욕설을 퍼부으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이는 사색이 되어 울면서 집으로 달려갔다. 엄마가 웬일이냐고 물었을 때 아이는 자기 목을 가리키었는데, 목에는 원보 두 개와 돈다발이 걸려있었다. 그래서 심마니들은 뱀을 보아도 뱀이라 하지 않고, 두꺼비를 보아도 절대 두꺼비라고 하지 않는단다.

“내일은 목욕재계하고 ‘방산’을 가야지” 라고 생각했다. “뱀을 보아도 뱀이라 하지 않고, 두꺼비를 보아도 두꺼비라고 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며 저녁을 먹었다.
식사 후 일행은 이도백하의 거리를 거닐었다. 한 상가에서는 예쁜 색동저고리로 만든 한복을 입은 일여덟 살짜리 여자애가 한국말로 “어서 오세요, 감사합니다.”라고 또랑또랑 말하고 있었다. 한복은 입었지만 말투가 이상해 잘 살펴보았더니 한족 애다.

이도백하에는 조선족보다 한족이 더 많다. 조선족마을은 이도백하에서 11km쯤 떨어진 곳에 있다. 이 마을은 백두산 아래 첫 동네라고 해서 하늘동네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미 120년의 이주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항일 전적지로도 유명하다.

상가주인은 애가 너무 한복을 입고 싶어해서 해 입혔다고 한다. 한면으로는 독특한 마케팅전략일 수도 있다. 해마다 백두산관광을 오는 국외 손님 중에는 한국인이 가장 많다. 조선말을 잘하는 딸을 자랑할 겸 한국손님을 끌 겸 딸애를 상가 선물 매대 앞에 세워둔 것이다. 손님들이 박수를 치며 칭찬했더니 아이도 으쓱한 표정이다.

이도백하는 작은 진이어서 잠깐 사이에 다 돌았다. 호텔로 돌아오는데 호텔문 앞 불이 밝은 곳에 흑진주 빛의 검은 것이 반짝거린다. 크기는 손바닥 절반만큼 하고 조개모양으로 둥글다. 앞으로 움직여 가고 있어 쪼그리고 앉아 바라보았다. 모두의 눈이 둥그레졌다. 하늘소였다. 그것도 뿔이 여느 하늘소보다는 한 개 더 많은 장수하늘소였다.
하늘소는 그 이상한 비밀무기를 내흔들며 땅에서 어슬렁 어슬렁 기어다녔다.

“이거 귀한 약재인데!”

중국말에 ‘삼구불리본항’(三句不離本行), 즉 ‘세 마디에 본업을 떠나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다. 약재전문가들이라 사물을 약재의 시각에서 보는 듯 했다. 우리 같으면 ‘이 무슨 이상한 벌레냐’라고 했을 텐데 그들은 우선 약재에 가치를 부여한다. 누군가 하늘소를 가루 내어 먹으면 결석을 치료한다고 했다.
모두들 이처럼 큰 하늘소는 처음 본다고 경탄했다. 그런데 너무 커서 누구 하나 그 괴짜를 집어들 념(생각)을 하지 못한다.

동우당 제약회사의 중국 대표 도재겸 이사가 유창한 중국말로 문 앞 걸상에 앉아있는 호텔 보안일꾼을 불렀다. 보안일꾼은 체격이 우람하고 씩씩한 20대의 젊은이였다. 어깨에 견장이 달린 제복차림을 했고 머리에는 둥그런 채양이 달린 높은 모자를 썼다. 손을 내저으며 자기의 업무범위의 일이 아니라고 했다. “니쓰 보안마, 콰이라이바”(당신은 보안일꾼이니 당연히 처리해줘야죠!) 라고 농담하며 도이사는 보안일꾼을 장수하늘소에게로 끌었다. 보안일꾼은 또 한번 강경한 태도를 보이다가 곧 포기하고, 히죽 웃으며 집게 같은 손으로 하늘소를 집어 들었다.

하늘소는 그 이상한 뿌리를 총 동원해 버둥거렸다. 누군가 호텔 식당에서 커다란 컵을 가져왔고 장수하늘소는 체면이 말이 아니게 컵속으로 이동됐다. 종이로 아구리를 막았다. 공기구멍을 가득 냈으니 불편하기는 해도 숨쉬는 데는 문제없을 것 같다.

7월 27일, 이튿날 아침이다.

떠날 준비를 하고 문밖에 나서니 비가 크게 쏟아진다. 장대비였다. “하늘소를 놓아주었어요?” 라고 물었더니 아직도 컵 속에 있단다. “하늘소가 컵속에 있으니 비가 내릴 수밖에…” 라며 나는 하늘소의 곤란한 입장을 생각해보았다.

차가 한참을 달려 이도백하 구역을 벗어나려고 하는데 도로검사소에서 제복을 입은 직원 2명이 나오더니 차를 멈춰 세운다. 비포장 도로여서 비가 내리면 길이 상하기에 차의 통행을 금지한다는 것이다. 큰일이었다.

창밖으로 동우당 제약회사와 거래관계가 있는 한족 안내원 오명주(吳明柱) 씨가 검사소 직원들을 설득하는 모습이 안타깝게 보인다. 비가 그의 머리와 어깨를 적셨다. 동우당 제약회사 都이사도 차에서 뛰어내려 검사소 직원을 설득했다. 비가 더 크게 내리자 그들은 다 같이 도로검사소의 자그마한 건물 속으로 들어갔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려서야 도이사와 오명주 씨가 나왔다. 다행히 그들의 얼굴빛은 개어있었다. 끝내 통행이 허가된 것이다.
차는 다시 시동을 걸고 앞으로 달렸다.

양 켠에 수림이 우거진 도로였다. 빨간 열매가 달린 나무들이며 이름 모를 꽃들이 비속에서도 배시시 웃고 있었다. 일행 중에 길림신문사의 주임으로 있었던 최광춘 선생이 있었는데, 그는 이 곳의 하마유가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하마는 개구리과 동물인데 암컷의 말린 수란관을 하마유라고 한다. 이는 고영양가의 보신제이다. 보신익정, 윤폐양음(補腎益精, 潤肺養陰)한다고 한다. 500g당 지금은 수 천위안(한화 수 십만원)에 상당한 고가보신약재이다. 연길 시장에는 한동안 북한에서 수입된 하마유가 중국 시가보다는 싼 가격에 팔렸었다. 그러나 그것도 곧 고가로 치달았다.

하마유의 중국 주요 산지는 동북삼성, 즉 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이다. 서리가 내리기 전에 잡은 것이 가장 좋단다. 가을이면 하마가 이 길옆에 쫙 깔리곤 했는데, 최근에는 잡는 사람이 많아서 많이 적어졌다고 한다. 수컷들은 모험을 즐기기 때문에 먼저 수림 속에서 나와 길에 납작하니 엎드려 동정을 살피곤 한단다. 자연히 위험에는 먼저 직면하게 된다. 차의 수량이 많아지면서 수컷들이 불행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암컷들은 보통 수림 속에 숨어있다가 수컷들이 안전하다는 것을 판단한 후에야 슬금슬금 나온다고 한다. 사실 암컷들의 가치가 수컷에는 비할 수 없이 크기 때문에 보호본능에 의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무도 머리가 있다는 신 교수의 말씀을 빈다면 하마도 머리가 있는 것이다.

일행은 앞을 내다보다가 다 같이 웃었다. 우산 하나가 활짝 공중에 떠있고 그 밑에 사람 넷이 한 묶음처럼 딱 붙어서 서있다. 차를 기다리는지 도로변에 까딱 않고 서있었다. 시골의 따뜻한 인심을 말해주는 정겨운 모습이다. 그 모습이 어떤 도로표지 같기도 하고 커다란 버섯 같기도 했다. 현대빌딩이 숲을 이루고 샐러리맨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현대화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일행은 차의 속도가 빨라 촬영 타이밍을 놓친 것을 크게 아쉬워한다.

비는 점점 더 세차게 내렸다. 노수하진(露水河鎭)에 이르렀을 때는 도로에 물이 가득 고여 있다. 노수하는 같은 길림성에 속하지만 연변은 아니다. 길림성 통화지구에 속해있다. 노수하는 삼을 망라한 약재가 유명해 ‘장백산 약원(藥園)’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다. 국제수렵장이 유명하고 또 중국 최대 홍송 임장(林場)을 가지고 있다.

中藥趣話(중약취화)’에는 “1989년 8월에 방산인(심마니) 3명이 길림성 무송현 노수하의 원시삼림에서 산삼 한 뿌리를 캤는데, 인삼전문가의 감정에 의해 이 야산삼의 중량이 305kg, 적어도 500여 년이 지난 산삼이라고 인정됐다. ‘기보(奇寶)’로 인정된 이 특대 노산삼(老山蔘)은 삼형이 극히 우수하여 국내외에서 사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몇 만 원에서 십몇 만 원, 수십만 원으로 값이 치달았는데, 이름을 밝히기 싫어하는 한 홍콩상인에 의해 108만위안(현재 환율로 1억 5천500만원 가량)에 팔려 국내에서 최고가 기록을 했다.”
라고 기록돼있다. 우리가 가야 할 대릉장산은 노수하에서 멀지 않아 차로 한 시간거리에 위치해 있다.

길 옆 화장실로 뛰어들어 볼일을 보고 나자 모두 편안한 표정으로 ‘장백산 특산물’ 간이상점으로 다가간다. 산들이 가득한 도로 중간에 설치된 특산물 매대이다. 인삼, 녹용과 기타 약재들, 골동품과 기념품들이 가득했다. 모두의 눈길이 자연히 인삼 매대로 다가간다. 한 한족 장년이 인삼 하나를 들고 25년 생이라고 했다. 모두들 신 교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신 교수는 인삼을 공중에 치켜들고 한참 여겨보더니 정말로 25년생이 맞다고 했다. 인삼들은 모두 잘 생기고 튼튼하고 싱싱했다.

빗물에 끊어진 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벌써 몇 군데를 지나왔다. 기사의 얼굴에 긴장이 어린다.
이도백하에서 3시간 반이 돼서야 목적지 대릉장 부근에 도착했다. 다른 때 같으면 2시간 반이면 도착한다고 했다. 기사는 더는 앞으로 갈 수 없다고 하면서 차를 멈춰 세웠다. 대릉장까지 가자면 도보로는 한참 가야 한다. 그런데 앞에 한 구간의 길이 뭉청 물에 밀려있었다. 물이 길 허리를 뭉청 자르고 콸콸 쏟아져 내렸다.

동우당 제약회사 측에서 준비를 잘 한 덕에 모두들 비닐 옷을 든든히 입고 우산을 들었다. 처음에는 신을 적시지 않으려고 까치 뜀을 하다가 곧 체념하고 첨벙첨벙 물에 들어섰다. 기사는 될수록 빨리 오라고 신신당부한다. 자칫하면 돌아갈 길이 막힌다는 것이다. 기사를 오랫동안 했기 때문에 길을 닦을 때까지 산골에 갇혔던 경험이 적지 않다고 한다.

“골물이 터지는 건 한 순간의 일입니다. 길이 밀리면 차도 위험합니다.” 라고 기사가 초조하게 말했다. 그렇게 되면 신변이 위험할 뿐 아니라, 이튿날 저녁 연길에서 떠나기로 계획된 허담 원장, 신민교 교수 등의 비행기표도 나무아미타불이 되고 마는 것이다.

지난 회에 소개한 약초 아바이 최진만씨 이야기를 한번 더 쓰려고 한다. 그의 약초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감탄했고 그의 약초사랑에 대한 깊이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최진만 씨는 워낙 애주가다. 약의 성능을 알면서부터는 수십 가지의 약주를 만들어 마셨다. 오갈피, 원지, 육종용을 한데 넣거나 따로따로 술을 만들어 마신다. 오미자, 원지, 시호, 벌통 등도 그의 술 재료로 쓰인다.
기운이 없을 때는 원지, 오갈피, 육종용을 마시면 이튿날 아침에 바로 기운이 솟는다. 인후염이 생겨 목이 간질간질하고 기침이 나오려고 할 때는 오미자 술을 마신다.
원지를 따로 불린 술도 마신다. 원지 2~3g를 패트병에 담가 뒀다가 피곤할 때면 취침 전에 알각잔(편집자 주: 각이 진 작은 술잔)으로 1잔씩 마신다. 며칠만 마시면 금방 잠이 잘 오고 눈에 정신이 돌고 기운이 난다. 보양을 위주로 하니 항상 숙면이고 어지러운 꿈을 꾸는 법이 없고 식미가 당긴다.

체중은 총각 때부터 지금까지 정확히 60kg을 유지하고, 혈압도 정상이어서 최고혈압은 늘 120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더운 날에 머리가 띵하고 혈압이 내려가는 느낌이 있으면 봉왕장을 5일 정도 마시고 정상상태를 회복한다.

산에서 벌통을 얻어 술에 담가서 마시면 혈압에 좋다. 좋기는 말벌통[馬蜂子]인데 올빠시[野蜂子]도 괜찮다. 2002년 7월에 팔포강 녹장(鹿場)에 갔다가 비술나무 꼭대기에 있는 벌둥지(편집자 주: 벌집)를 발견했다. 말벌둥지여서 너무 기뻤다.

한창 7월이라 벌이 너무 많아 손을 대지 못했다. 서리가 내리면 벌이 둥지 안으로 들어가는데 그 때에 보자고 혼자 벼르며 자리를 떴다. 가을에는 일이 바빠 가지 못하고 이듬해 6월에 가보니 나무가 보이지 않는다. 수십 리를 말벌둥지 때문에 찾아갔는데 텅 빈 자리를 보니 맥이 풀린다.
나무가 땅에 쓰러져있었다. 광풍이 불었던 모양이다. 말벌둥지는 많이 짓눌리고 깨어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벌둥지를 주어다가 집에 와 술에 담가두었다가 마셨더니 정력이 좋아지고 정신이 맑아지더라고 했다.

최진만 씨는 자신과 가족의 병은 미리 캐두었던 약초들로 치료하곤 한다. 집에는 수십 가지의 약초가 있다. 독이 없는 약초는 응달에 말리고, 독이 있는 약초는 소금물이나 쌀 뜨물에 담가 독을 뺀 후 말려 쓴다.
감기에 걸리면 도라지, 용담초, 승마, 방풍, 시호를 넣어 한 첩 달여서 먹으면 금방 떨어지곤 했다. 변비에 걸리면 앵두씨나 복숭아씨를 깨서 먹는데, 심할 때면 1알, 보통 때는 반 알 먹으면 금방 해결되곤 했다고 한다.

그는 옴니허브 약재작업장 담장에 피어있는 둥근 솜뭉치같이 부드러운 푸른색 식물을 가리켰다.
댑싸리, 즉 지부자라고 했다.
한번은 쥣병에 걸렸는데, 링거 주사를 맞는 한편 이뇨제인 지부자를 달여 마시고 소변을 배출했더니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낫더라고 했다. 그의 집 식구들은 병이 나도 약초 외에 양약을 먹는 법이 없단다. 그래도 모두가 아무 병 없이 건강하다고 한다.

최진만 씨는 좌골신경통에 걸려 허리며 다리가 아팠었다. 그는 백복령과 천문동을 섞어 책에 적혀있는대로 1g씩 매일 2번 먹었는데 별 효험이 없었다. 양을 조금 늘려 2g씩 2번 먹었다. 효험이 좀 있는 듯 했지만 여전히 시원치가 않았다.
이번에는 고삼 벌레를 7~8마리 정도 술에 담가 이 약을 먹을 때마다 한잔씩 마셨더니 허리 쪽은 많이 나았다. 하지만 그 독이 왼쪽 발등에 걸려 발등이 아팠다. 그래서 유백피(楡白皮), 양제근(羊蹄根)을 가루 내어 발등에 붙였더니 3일 만에 살이 검게 되면서 독이 빠지고 깨끗이 나았다고 한다.

가끔 주변 사람들에게도 처방을 내주곤 했다. 한 노인친구가 변비를 호소해 천문동, 백복령을 가루 내어 1g 정도 하루 한번씩 먹게 했더니 매일 식전마다 정확히 배변할 수 있었다.
한번은 23살 먹은 젊은 총각이 좌골신경통 확진을 받고 고민하기에 자신이 치료했던 경험대로 약을 써주었더니 금방 나았다고 한다.
주변사람들은 아픈 곳이 있으면 최진만 씨를 찾았고, 최 씨도 기꺼이 해결해주곤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먹어보지 않은 약재는 절대로 권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옴니허브에서 자신이 원하는 약초 일을 하니 인생이 즐겁다고 했다. 매일 약초를 알뜰히 정선하고 건조시키고, 널어놓은 약초들을 자주 뒤집어 습기를 뺀다.

그는 9월이면 시간이 있어 산으로 가서 약초를 캐겠다고 했다. 두 손을 마주 부비는 그에게는 자기 손으로 캐는 약초에 대한 그리움이 우러나고 있었다.

약초는 하늘이 인간에게 덤으로 주는 생명이다. 중국말에 ‘산이 있는데 땔나무 걱정이 있느냐’ 라는 속담이 있다. 근본을 따르면 만사가 풀린다는 뜻이다.

욕심을 버리고 자연에 가서 깨끗한 공기를 마시고, 깨끗한 햇볕을 쬐고, 산길을 걸으며 뼈를 튼튼히 하고, 푸른 산 푸른 물 푸른 숲을 보며 기쁨을 얻는다면, 이것이 장수의 비결이지 무엇이겠는가?

자연이 있는 한 건강 걱정은 필요 없다. 웰빙은 다만 인간이 순기자연(順氣自然) 하느냐 안 하느냐에 달린 모양이다. 최진만 씨 얼굴에 피어있는 만족스런 웃음을 보며 이 간단한 도리를 마음에 깊이 새겼다.

7월 26일은 날씨가 화창하게 개였다. 땅은 비에 젖어 축축한데 하늘은 푸르고 햇빛이 투명했다.
일행의 표정이 무척 밝다. 이제 여름은 8월 중순까지 이어진다. 연변에서는 가장 좋은 여름 날씨다.

연변은 봄, 여름, 가을이 짧고 겨울이 길다. 짧은 여름에도 비가 많아서 무더운 날씨는 얼마 되지 않는다.
몸짱을 자랑하고 싶은 여성들에게는 참으로 유감스러운 기후이다. 금방 팔을 드러낸 적삼을 입었는데 어느새 8월 중순 마늘장아찌를 절이는 냄새가 가을을 알릴 때면 무척 서운하다. 지구의 온도가 높아지면서 지금은 그래도 여름이 많이 길어진 편이다.

차는 용정을 지나서 대성에서 백금 방향으로 굽어 들었다. 대신에 이르러 일행은 차를 멈추고 저수지 쪽을 바라보았다. 저수지의 물결이 은어의 등처럼 예리한 햇빛을 반사하여 눈이 시고 부셨다. 국도로부터 경사지게 저수지까지 뻗은 풀밭에는 분홍색의 달구지 꽃, 보랏빛의 갈퀴 덩쿨, 하얀 개망초, 노란 달맞이 꽃이 가득 피었다. 그야말로 가지각색 약초가 뽐내는 풍경이다.

“이 꽃은 밤이면 피고 해가 나오면 오므리는 꽃이어서 달맞이 꽃이라고 하는 겁니다.”
달맞이 꽃에 렌즈를 들이대며 정종길 교수(동신대)가 설명했다.

달맞이 꽃은 꽃이 노랗고 작고 잎사귀도 모양이 특별하지 않지만 여느 풀과는 다르게 자기 주장이 분명하다. 일편단심 한 님만 모시는 충성의 꽃이니 말이다. 고지식한 성미는 태양만 에워싸고 도는 해바라기와 비슷하다.

‘자연에 있어 그러한 의지는 어떤 의미가 되는 것일까’
라고 식물학에 문외한인 나는 식물의 의지를 인간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해보았다. 생각으로 살아가는 인간은 한 순간에도 변화가 심하지만, 자연과 본능의 화합에 충성하며 사는 식물은 인간의 요상한 생각이야말로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인간의 생존의식과 지혜는 끝없이 문명을 만들고, 문명은 우주에서의 인간의 자리를 빠른 속도로 좁혀가고, 인간이 만들어낸 쓰레기의 자리를 빠른 속도로 늘여주고 있다.
이 이율배반의 악성순환에서 인간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인간세상에서 답이 없는 이 문제를 저 달맞이 꽃은 간단하게 풀어 나갈지도 모른다.

이 때 신민교 교수(원광대)가 달맞이 꽃(월견초)에 대해 설명했다.
“일년생이면 뿌리가 있고 이듬해에는 없어요. 종자번식을 위해 뿌리를 키운 거지만, 이듬해에는 그 뿌리가 썩어버리는 거요.”
익모초도 그렇고, 백지, 당귀도 그렇단다. 이듬해에 꽃이 피면 곧 죽어버리는 것은 종자를 남기는 사명을 완수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약초의 인생과 인격으로는 하나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무도 머리가 있는 거요!”
신 교수의 말씀에 모두들 폭소를 터뜨렸다. 무는 당해 10월에 심어야 무가 나오고 이듬해에 심으면 쫑대(장다리)만 나온단다. 즉 씨만 난다는 것이다.
“시간 없어, 무는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너무 급해서 씨만 만든 거요. 이것이 번식 본능인 거지. 무를 우습게 보지 말아요. 무도 머리가 있어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그 깊은 뜻에 대해 찬찬히 음미했다.

그렇게 보면 정말로 달맞이 꽃이며 무며 백지, 당귀 등 자연의 모든 것이 머리가 있는 것이다. 자연이 춘하추동을 되풀이하는 것을 절대로 무심하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신 교수는 종자번식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인간도 마찬가지인데 지금 암이 많은 것도 자연을 어기기 때문이라고 했다. 제왕절개는 아기를 꺼내는 것이지 아이를 낳은 것은 아니란다.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자연분만은 자연의 순리에 의한 하나의 완성이지만, 인공분만은 인간의 의지의 완성일 뿐 자연의 완성은 아니다. 아기는 나왔지만 인간의 번식과정에 논리적으로 전개되었던 생리의 프로그램은 완성이 되지 못한 채 강제로 닫히게 된 것이다.

인간은 점점 더 향수욕에 젖어 번식본능의 자연을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 나부터도 그렇지만 아이를 하나만 낳는 것은 인간의 자연을 어기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는 지금 점점 더 암이 기승을 부리고 소염제의 발전을 뛰어넘는 빠른 속도로 사스를 망라한 이름 모를 병독이 쏟아져 나온다. 무도 머리가 있는데 하물며 무의 자궁인 자연임에야. 자연의 순리를 어기는 인간이 자연의 벌을 어찌 피할 수가 있을까.

신 교수는, 아기에게 모유를 먹이지 않기 때문에 지금의 아이들이 다소곳하지 않고 쉽게 뜬다는 것, 그것은 젖을 먹이는 엄마는 아기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인간의 사랑을 먹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머리를 수그리지만, 우유를 먹는 아이는 자연스레 뿔로 들이박는 소를 닮게 된다는 것이다. 그 말에 일행 모두가 웃었지만, 참으로 심사숙고할만한 부분이었다. 모유를 먹이느냐 우유를 먹이느냐에 따라 인성이 변할 수도 있음을 엄마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것 같다.

백금령에 이르러 차는 다시 멈춰 섰다. 최진만 노인과 임승춘 노인이 장비를 꺼냈다. 쇠를 갈아 뾰족하게 만들고, 발 힘으로 압력을 가할 수 있도록 십자가모양으로 나래를 만들어 작은 자루에 맞춘 이상한 모양의 장비였다.
나는 호기심이 동해 그 장비를 땅에 대고 발로 나래 부분을 꽉 눌러서 힘주어 팠더니 생각밖에 큰 반경의 흙이 일어나면서 그 복판에 있던 백출이 뿌리 한 가닥 상하지 않고 쉽게 파헤쳐졌다.

백금령서도 자연은 분에 넘치는 선물을 펼쳐주었다. 진분홍 꽃이 기다랗게 달린 익모초, 노란 호미꽃, 보랏빛의 황금, 초롱같은 꽃이 대룽거리는 사삼 등 약초들이 자태를 뽐내며 서 있다. 누군가 난같이 길고 갸름한 황금의 이파리를 살피며 이 이파리를 한족들이 차로 즐겨 마신다고 했다.

약초들이 많은 중에도 호미꽃의 이름이 참 재미있었다.

호랑이도 들으면 깔깔 웃을 것 같다. 동그스름한 노란 이파리가 술을 중심으로 외겹으로 둥글게 원을 지었다. 이 작은 꽃을 솔잎 같은 잎사귀가 받쳐준다. 그 잎사귀가 호랑이의 눈썹을 닮았다고 그런 이름이 붙었단다.

“요놈을 찍어주지 않으면 안 되지. 내 발에 걸렸어. 안 찍으면 여태 여기 있은 보람이 없잖아. 이렇게 잘 핀 것 첨 봤어.”

신민교 교수(원광대)는 약초와 만나는 방식이 손자라도 만나는 식이다. 항상 약초의 인격을 의인화하여 마치 서로 눈이라도 맞추는 듯, 속을 서로 들여다보는 듯이 대화한다. 지난번에는 원지가 발에 걸렸다 하더니 이번에는 호미꽃이 또 발에 걸렸단다. 우리 같으면 절대로 발에 걸렸다는 표현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약초와의 만남이 다른 사람과 달랐다. 수십 년을 산과 만나고, 춘하추동의 색다른 모습의 약초와 만나서 정감을 나누며 이런 교감이 자연스레 삶의 방식으로 굳어진 모양이다.

“이 놈은 자연 강장제야. 양지식물인데 잔디밭 제방 쪽에 많이 나거든. 꽃 피기 전의 뿌리는 지혈제고…”

신 교수는 보는 약초마다 그 성능에 따라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피여 줘서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와 있었다.

한켠에서는 최진만 노인이 백출을 캤다. 모양이 거친 봉오리가 힘있게 맺히고 이파리가 싱싱하고 뿌리가 든든했다.

일행은 길에서 멀지 않은 옅은 숲 속에 들어갔다. 복분자가 보였다. 빨갛고 작은 열매에 씨가 30여 개 달렸다.
열매에 씨가 많아서 정자생성에 도움이 되는 약초라고 했다.
부인병에 좋다는 취나물, 예쁘고 맛있는 멍석딸기, 산머루, 싸리꽃, 검정버섯(黑木耳)이 아기자기 다정한 이웃같이 어우러져 있다. 귀한 버섯이라고 검정버섯은 촬영 뒤에 여럿이 나누어 먹었다. 자연의 보너스였다. 쫄깃쫄깃 귀 맛 좋은 소리가 나고 풋풋한 향이 코와 혀에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숲 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누군가 비 온 뒤라서 뱀이 있을 거라고 하여 나는 신경이 곤두섰다. 하얀 버섯이 보였다. 청갈버섯이다. 일행중의 누군가 이 버섯은 먹어도 된다고 했다.
벌레구멍이 숭숭 났다. 벌레는 독을 안단다. 그래서 독이 없는 버섯은 벌레가 맛을 본 것이란다. 벌레에게 이처럼 감사해본 적은 없다.

감수는 동그스름하고 무늬가 아련하고 입사귀가 두 개씩 예쁘게 피었다. 독이 있는 풀이라고 하면서, 이 약초는 간경화 복수 등에 쓰인다고 했다. 보통의 경우는 뿌리의 즙을 혀에 대기만 해도 복통이 심하다고 한다.
역시 자연은 선생님이다. 자연 앞에서 건방을 떨다가는 코피가 터지는 정도만이 아니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나는 혼자 진심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은방울이라는 약초를 만났다. 머루알 같은 열매 여섯 알, 큰 잎사귀 두 개 옆에 외롭게 달린 열매, 귀한 약초라 암행어사가 머리에 달고 다닌다고 한다. 어찌 타고 날 때부터 귀천이 없다 하랴. 은방울은 타고 날 때부터 양반 약초인 셈이다.

박새는 백금에 도착해서 길섶에서 만났다. 검자주 빛의 꽃에 이파리가 여섯 개 달렸다. 누군가 참 지독하게 생겼다고 말했다. 생김생김과 같이 지독한 약초였다. 그러나 인간이 가장 절절하게 반성할 때 회생의 기회를 주는 약초가 아닐까. 간암에 쓰인다고 한다. 암에 걸린 사람 치고 자신의 삶을 반성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우엉도 만났다. 우방자라고 부른다. 자줏빛 꽃술이 장닭의 볏 같이 생겼다. 뿌리가 강장제라서 대력자(大力子)라고도 한다. 요리로도 맛있다고 한다. 뿌리를 깨끗이 잘라서 닦아 먹으면 쫀득쫀득하고 맛있단다. 열매가 익으면 가시가 땅땅하고 예리하여 가시열매라고도 부른다. 민간에서 암 예방약으로도 쓰이는데, 우방자에 무 잎, 표고버섯을 끓여서 먹는다고 한다.

두만강이 푸르게 흘렀다. 소용돌이가 치는 것을 보면 꽤 깊어 보인다. 대안은 북한 회령군 유선 노동자구이다.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은 금방 대안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엄연히 국경이다. 북한 쪽에는 군인초소가 있고 초소 앞에서 군인들이 웃통을 벗고 곡괭이를 휘두르고 있다.
일행은 묵묵히 북한 군인들을 바라보았다. 그 쪽에서도 한국인인줄을 알아보고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가슴속에 저 두만강같이 흐르는 소원이 있다. 그것은 7천만의 소원, 하나의 나라, 바로 통일이리라.

도라지 관리원 정유국 씨의 집 대야에 마치현(馬齒현)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잎사귀는 떼고 줄기만 손가락만큼한 크기로 잘라서 데쳐낸 것이다. 처음에는 고사리줄기를 따놓은 줄로 알았다. 줄기가 통통하여 고사리를 닮았다. 정유국 씨는 마치현을 기름에 볶아서 요리해 먹는다고 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약전(藥典)≫에 의하면 마치현은 열을 내리고 습을 없애고 부기를 내린다. 마치현은 악창(惡瘡)에도 좋은 외과 약이라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당나라 의학가 맹선(孟詵)은 마치현 찹쌀 죽으로 ‘기가 통하지 않아 생기는 설사나 창병’을 치료했다고 한다. 현대의학이 증명한데 의하면 마치현은 피부염, 각막염, 결합막의 정상기능 회복, 야맹증 등에 좋고, 위궤양, 십이지장궤양, 구강점막궤양 등에도 좋다고 한다. 또 임파결핵궤양, 급성맹장염, 산후열 등도 치료한다고 한다.

마치현을 민간에서 우리말로 ‘도덕풀(도적풀)’ 또는 ‘돼지풀’이라고 불렀으므로 나도 그렇게 불러왔다. 땅에 넝쿨을 뻗으며 기어가듯이 붙어서 자란다고 ‘도적풀’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이 붙었는지 모를 일이다. ‘돼지풀’이라는 이름은 돼지가 좋아해서 생겨난 이름일 것이다. 한국에서는 쇠비름으로 부르는 모양이다.

마치현은 잎사귀가 큰 물방울모양으로 갸름하고 통통하고 줄기가 기름지고 탄력이 넘친다. 넝쿨처럼 옆으로 뻗었으므로 위로만 솟은 다른 식물처럼 따분하지 않고 개방적이다. 마치현의 잎사귀 모양이 말 이빨처럼 생겼다고 마치현이라고 불렀을 것이지만, 그 이름은 마치현의 귀엽고 예쁜 모양에는 손색이 가는 이름이다.

마치현은 이름이 수십 가지라고 한다. 어떤 곳에서는 마치현의 모양이 귀여워서 ‘팡와와(방娃娃<방와와>)’, 즉 ‘포동포동한 아기’라고 부르고, 어떤 곳에서는 마치현이 아무리 바람이 불고 태양이 쬐여도 쉽게 시들지 않는다고 ‘장수초’, 또는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심불감(心不甘)’이라고 부른다.

마치현은 색깔이 푸른빛인가 하면 자주 빛이 섞여있고, 이렇게 볼 때는 푸른빛이고 저렇게 볼 때는 자주 빛이다. 그래서 마치현은 ‘오행초’ 또는 ‘오방초’라고 부르기도 한다. ‘잎사귀는 청빛, 줄기는 적색, 뿌리는 백색, 씨는 검은 색’이기 때문에 목화토금수 오행색을 상징한다고 한다.

또 전설에 의해 ‘태양초’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하늘에 해 열 개가 동시에 떠서 강바닥이 갈라 터지고 곡식이 말라죽게 되었다. 후예라는 용사가 나타나 해들을 하나하나 쏘아 아홉 개를 떨구었다. 열 번째 태양은 마치현의 잎사귀에 숨어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된다. 그리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해는 마치현의 구명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아무리 무더운 여름철에도 마치현에게만은 불벼락을 쏟지 않아 마치현이 늘 싱싱하다고 한다. 그래서 마치현은 또 ‘보은초(報恩草)’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동네에는 조선족이 적고 한족이 대부분이었다. 조선족은 단층 줄집에서 살았고, 한족들은 청나라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여 검은 기와를 얹은 독집, 독 울안에서 살았다. 한족 집의 높은 대문을 열면 뜰 안에는 가득 마치현이 널려 있곤 했다.

다른 풀들은 자르거나 뽑아놓으면 금방 시드는데 마치현은 수일이 지나도 싱싱하고 기름졌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소꿉놀이를 할 때면 마치현이 늘 요리로 오르곤 했다.
한족들은 옛날부터 마치현을 야채로 취급해왔다. 여름과 가을이면 그들은 마치현의 뿌리를 자르고 깨끗이 씻어 끓는 물에 데쳐낸 후, 물기를 빼서 소금, 식초, 간장, 생강즙, 마늘즙, 깨 기름에 메워서 먹는다.

또는 마치현을 밀가루에 섞어 지짐이를 구워서 먹거나, 마치현소를 넣고 기름떡을 하거나 보우즈[包子]를 빚어서 시루에 쪄 먹기도 했다. 일부는 말려서 저장했다가 음력설 음식인 죠즈[餃子]를 만들어 먹곤 했다.

음력설에 먹는 죠즈(물만두)는 한족들에게 있어 경건한 음식이다. 해마다 한번씩 마을에 와 사람을 잡아가는 연(年)이라는 귀신을 쫓고나서 사람들은 설을 쇠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설을 쇤다는 말을 중국말로 과년(過年)이라고 한다.

말발굽모양으로 만든 죠즈에는 새해에 부자가 되라는 소망이 스며있다. 죠즈를 많이 먹을수록 돈을 많이 번다고 하여 한족들은 음력 그믐날 밤 12시에 온 가족이 모여 죠즈를 먹는다. 이처럼 중요한 음식에 마치현소를 넣은 것을 보면 마치현은 민간에서 길한 식물이다.
하지만 도시의 식탁에서는 마치현을 볼 수 없다. 층집이 높아갈수록 인간은 마치현을 망라한 자연을 멀리하게 된 모양이다.

정유국 씨는 장춘(길림성 소재지)에서 열린 동북삼성 농업박람회에 뉴질랜드에서 수입한 마치현이 전시돼있더라고 하면서, 약초로도 좋지만 건강에도 좋은 요리감이라고 했다. 중국에서 자라는 마치현은 땅에 붙은 채 넝쿨모양으로 뻗어 수확하기 불편한데, 뉴질랜드에서 수입한 마치현은 부추처럼 곧게 자라서 낫으로 수확하기 좋을 것 같더라고 진지하게 말했다.

언젠가 마치현의 시대가 오지 않을까? 우리의 식탁에 한자리 굳힌 부추나 시금치, 홍당무처럼 말이다. 수입품으로까지 나타나고 있으니 국제적으로도 상당한 가치를 과시하고 있는 듯싶다. 또 마치현이 수입품으로 나타나기까지 우리가 얼마나 마치현을 멀리했는지를 한번 생각해볼만한 일이다. 마치현과 마치현들이 가득한 생명의 자연을 말이다.

마치현에 대해 우리 연변말로 ‘도적풀’이나 ‘돼지풀’이라고 했던 이름부터 고쳐야 할 것 같다. 인간에게 너무 큰 혜택을 주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인간의 깨달음에 달린 일이다.
약초는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깊은 계시이다. “자연에 겸허하게 머리 숙이라, 마음을 열어라, 귀를 기울이라”고 마치현은 말하고 있었다.

차는 소기골을 떠나 용정방향으로 달렸다. 약초 촬영이 끝나고 정유국 씨의 집 울타리를 나서자 멈추었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차창가로 흘러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일행은 하늘에 감사했다. 차는 동으로 달려 동불사를 지나고 조양천을 지나 해란강이 보이는 용문교에 들어섰다.

용정은 광복 전에 우리 조선족의 문화중심 및 해외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 가장 먼저 이 땅에 이주한 사람은 장인석, 박윤언이란 농민이었는데, 그 때가 1884년이다. 그들이 버들과 갈대를 베고 불을 질렀던 흔적이 해란강반의 저 넓은 들에 남아있을 것이다. 1906년에는 이름난 애국 투사 이상설, 이동녕, 왕창동 등 인사들이 ‘세전서숙’을 꾸려 해외 반일교육의 장을 열었고, 1919년에는 3.1운동의 연장선인 3.13운동이 일어나 해외 반일 독립운동의 열기를 고조시켰다.

길옆으로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유서 깊은 용정우물이 스쳐 지난다. 장인석, 박윤언이 처음 발견한 것으로 한밤중에 집안이 환하여 바라보니 우물가에 서기가 피어나면서 용이 승천하더라는 전설의 우물이다.

차가 용정에서 5분 정도 더 달리자 해란강가에 세전벌이 끝이 보이지 않게 펼쳐져 있다. 울퉁불퉁한 곳도 없이 융단을 편 듯이 반듯한데, 미풍에 푸른 벼가 넘실댄다. 차를 타고 세전벌을 지나칠 때마다 나는 ‘백여 년 전 살길을 찾아 헤매던 우리의 선조들이 이 땅을 보고 그 얼마나 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으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넓고 부드럽고 아름답게 펼쳐진 땅이다. 비가 내리고 있어 7월의 논밭은 한결 푸르다.

한국 동우당제약의 옴니허브 약재작업장은 세전벌의 태평촌 중심에 위치해있었다. 비닐지붕아래 구멍이 숭숭한 채발로 된 선반에 깨끗하게 정리된 야생 도라지와 사삼, 가시오갈피가 가득 널려있다. 그 옆 기계소리가 나는 건축물은 약재 건조실이었다. 나무로 불을 때고 풍구를 통해 열을 바람으로 순환시켜 약재를 말린다고 했다. 비닐지붕에 내리는 빗소리가 가락 맞게 들려오고 약재의 특유한 향기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주변에는 보라빛 술을 드리운 옥수수가 한창이고 울타리에는 통통한 唐콩이 가득 매달려있다.

약초 아바이 최진만씨옴니허브 작업장에서 약재를 돌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올해 66세, 씩씩한 모습이 무척 건강해 보였다. 그는 지금까지 몸에 아무런 병도 없다고 한다. 그야말로 자연의 최대 혜택을 받은 것이다. 그의 약초인생이 건강을 만든 것이리라.

최진만 씨는 청년시절부터 약초에 대한 애호가 각별했다. 약초공부를 할 여건이 안돼 약초에 관한 책들을 읽으며 자습했다. 산을 돌아다니며 책에서 본 약초그림과 대조해 틈틈이 약초를 익혔다. 한 약초는 반드시 세 번 확인과정을 거치곤 했다. 그림에 따라 약초를 찾고, 봄에 싹이 돋은 모습, 꽃이 핀 모습, 가을에 열매가 달린 모습을 비교해서 책에서 본 약초임을 확인했다. 약의 성능은 반드시 책의 설명에 근거해 자신이 먹어보며 익혔다.

그는 용정시 광신향 용지촌에 살고있었는데, 30대 초반인 70년대부터 약초재배를 하였다. 그 때 마을에는 위생소(衛生所, 지금은 향병원임)가 있었는데 최진만 씨는 그 병원의 제약일꾼이었다. 병원의 직원은 총 4명, 의사 1명, 보조의사 1명, 약제사 1명, 제약일꾼 1명이었다.

70년대는 ‘문화혁명’ 시기이다. 이른바 ‘문화혁명’이라는 것은 1966년부터 10년간 모택동이 반대파를 숙청하는 운동을 일으킨 대동란(大動亂)을 말한다. 모택동은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10대 중학생들인 ‘홍위병’ 백만 명을 북경에서 수차 접견했다. 그들은 모택동의 기치를 들고 곧 거리로 뛰쳐나가 모택동의 반대파인 국가 주석 유소기를 저택에서 끌어내 타도하고, 중앙 총서기였던 등소평을 타도하고, 모든 높고 낮은 집권자들에게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집권파’라는 패쪽(작은 흑판모양의 나무 간판에 죄명을 적어 목에 걸게 함)을 메우고 고깔모자를 씌워 조리돌림을 하여 타도했다.

이 시기에 용정현 위생국 국장이었던 사람도 조리돌림을 당하고 이 마을에 노동개조하러 쫓겨왔다. 국장은 의사출신이라 초가 하나에 위생소 패쪽을 달고 의사로 복무하게 되었다. 하지만 쌀독이 빈 며느리모양으로 약이 없어 의사노릇을 할 수 없었다.

문화혁명 때문에 중국의 경제는 마비상태고, 병원마다 약품창고가 바닥이 나 있었다. 병원에서 진찰 한번 받으려면 새벽부터 줄을 서야 했다. 교통이 불편해 소수레를 타거나 도보로 수십 리를 걸어서 병원에 찾아오곤 했다.

농민들은 죽을 정도가 아니고는 병을 보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른바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집권파’이긴 해도 용정 위생국 국장이었던 의사가 이 마을에 나타난 것은 농민들에게 그야말로 큰 은혜였다.

당시는 이른바 ‘합작의료’ 시기여서 해마다 농민들에게서 20원 정도(한화 3천원에 해당함)를 거두고 평소에는 무료로 치료했다. 농민들이 지불한 합작의료비로는 어림도 없다. 약재의 원가를 최대한 낮추어야 한다. 국장은 약재를 심고, 약을 만들기로 했다. 연변에서 나지 않고 남방에서 나는 약재는 농민들이 지불한 돈으로 사들였다. 국장은 역시 국장이었는지라 병원에 사정하여 고압 솥을 얻어왔다. 제약설비를 갖춘 것이다. 그 때로부터 최진만 씨는 이 위생소에 약재를 제공하는 약초 관리원 겸 제약일꾼이 되었다.

최진만 씨는 밭에 원지, 용담초, 시호, 방풍, 황기, 오미자, 구기자 등 수십가지의 약초를 심었다. 고압솥에 익모초와 생당쑥을 달여 익모초환을 만들고 승마, 용담초 등에 계피를 섞어 달여서 감기약을 만들고, 부족한 약재를 약방에서 사다가 십전대보환, 보신환 등 환약을 만들었다.

연변농학원 제약공장의 설비를 빌려 주사약도 만들었다. 포도당원료를 끓여 증류수를 받아 주사약을 만들고, 개의 뇌를 증류가마에 달여 신경환자들을 치료하는 주사약을 만들었다. 제약이 힘들 때는 위생소의 4명이 전부 동원돼 밤 늦게까지 약을 만들곤 했다.

국장은 재배한 약재에 근거해 약방에서 부족한 약재를 사다가 처방을 내서 농민들의 감기를 치료하고 기침을 떼 주고, 여성들의 냉병을 치료하여 아기를 낳게 하고, 기운이 없는 사람들을 보신해주고, 기타 병들을 치료해주었다. 농민들의 집에 찾아가서까지 왕진하며 애를 쓴 보람에 이 위생소는 점점 더 소문이 나서 농민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줄을 섰다. 그 때마다 최진만 씨는 마음이 흐뭇했다고 한다.

70년대가 지나가고 ‘문화혁명’도 끝나고 등소평에 의해 개혁개방이 되자 ‘합작의료’는 종료되었다. 그 때로부터 최진만 씨는 농사하는 한편 약초를 캐서 팔았다. 한 사람의 인생에는 인연이 수두룩이 나타난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연은 자기의 애호(愛好)가 맺어주는 것이다. 최진만 씨도 약초에 대한 사랑이 인연이 되어 1994년에 한국 동우당제약과 만나게 됐다.